韓·日 역사서에 내용 담겨
최대 4명 태워 30리 날아
인명·식량·지포 등 운반해

충북 청주시 공군박물관 내 설치돼 있는 비거 모습.
충북 청주시 공군박물관 내 설치돼 있는 비거 모습.

 

지난 8월16일 오후 3시, 진주시청 브리핑룸에서 서울에서 온 영화감독과 극단장이 소설 <비차>를 원작으로 영화와 뮤지컬을 제작한다는 발표회를 가졌다.

평소에 본인은 진주에 살면서,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관련 고전을 바탕으로 여러 편의 진주역사, 문화 관련 논문이나 기사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라이트형제가 1908년12월에 띄웠다는 플라이어호라는 비행기보다 무려 311年이나 앞서 1592년 진주의 하늘에 비차(비거)라는 비행물체가 날았다는 여러 자료 문건을 접했다.

그래도 본인은 그 사실에 신빙성을 갖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워 지금까지 비차관련 고전이나 자료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2018년 8월16일 한국의 저명한 영화기획사와 극단에서 비차 관련 영화나 뮤지컬을 제작한다는 발표회에 참석한 이후에 비차에 관련된 고전자료와 서적 그리고 특히 소설가 김동민이 2016년에 저작한 소설 ‘비차’를 통독하면서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위를 비차가 날았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본고에 진주 비차에 연관되는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그 분들(영화제작자, 뮤지컬제작극단, 비차발전위원회)의 기획자료와 프로젝트들의 구체적 내용과 진행과정을 관찰하면서 기술해 보기로 한다.

동시에 본고는 오직 현재까지 나타난 각종 고전자료의 내용만을 소개하는 수준일 뿐 본인의 특별한 주장이나 이론정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우선 비차관련 고전기록들의 내용을 소개한다면, 일단 비거라는 이름의 비행기가 등장하는 기록은 일본역사서 「왜사기(倭史記)」가 있으며,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비행에 관한 기록으로는 신경준의 「여암전서(旅菴全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그리고 1923년 한글학자 권덕규(權悳奎)선생이 쓴 「광문사(廣文社)」에서 출판한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가 있다.

신경준의 「여암전서」, 「책거제(策車制)」에 따르면, 비거를 만든 사람은 김제 사람인 정평구(鄭平九)라는 인물로, 왜병에게 포위된 영남의 어느 읍성을 지키던 성주의 친한 지인이 이 비거를 만들어서 성 안으로 들어가, 친구를 태우고 30리 바깥으로 날아가서 지상에 착륙해 왜적의 칼날을 피하게 했다고 한다.

「오주연문장전산고」,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 에는 인조 때의 사람인 전주부(全州府) 출신의 김시양(金時讓)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말이라며, “호서(湖西)의 노성(魯城) 지방에 사는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명재(明齋)의 후손이다. 이 사람이 정밀하고 교묘한 기구를 만드는 재간이 있어, 비거를 창안하여 기록해 두었다.”고 했다. 조선 철종(1831~1863년)때 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에 의하면 ‘임진왜란(1592~1599년)때 정평구란 사람이 비거를 만들어, 진주성에 갇힌 사람들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비거는 30리를 날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비거는 4명이 탈 수 있고 따오기 같은 모양으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나 공중으로 떠오르고, 능히 100장(300m) 가량을 날 수 있는데, 양각풍(회오리바람)이 불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광풍이 불면 추락한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서 이 비차를 제작했던 정평구(鄭平九)의 인적사항과 당시 역할을 살펴본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책에는 비차, 혹은 비거라는 기계의 기록이 있다. 또한 선조실록에도 따오기 모양의 비행체풀무를 이용하여 공기를 불어넣어 네 사람이 타고 30리를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정평구가 비행기와 비슷한 날 수 있는 기계를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평구는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논어와 맹자를 줄줄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이 되어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여 무과에 응시하였고, 이후 무관 말단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정평구는 이억기에 의해 진주병영 별군관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에 김시민의 휘하에서 화약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 이 당시에 일본의 신식무기인 조총 앞에 조선의 창과 화살은 매우 무력하였고, 진주성의 우리 군이 수세에 몰리자 오늘날의 비행기와 비슷한 비차(飛車)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비차는 30리를 날아 인명과 식량, 지포(紙砲) 등을 날랐다고 한다. 사실상 이 비차는 전쟁 중인 진주성 하늘을 날아 원병을 요청하고 무기를 공급하는데 큰 공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당시에 진주라는 지리적, 지형적 환경에서 과연 비행체를 날릴 수는 있었을까?

진주성은 비행체를 날리기에 충분히 높은 지형이다. 이뿐만 아니라, 성 뒤에 있는 남강으로 인해, 이 주변은 낮에 물의 증발, 바람의 영향(산곡풍) 등으로 상승기류가 생기게 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활공을 한 뒤. 다시 성으로 귀환할 때는, 진주성으로부터 가까이에 있는 산을 이용하여, 산 위에서 활공을 하여 귀환할 수 있었다.

2000년 4월에는 KBS 역사스페셜 제작진이 남아있는 기록으로 비거를 복원하여 20m의 높이에서 70m까지 비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2000년 12월에 공군사관학교의 비거 복원팀이 비거를 복원, 실험을 하여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비거제작팀은 대략 6개월간에 걸쳐 임진왜란 당시 사용 가능했던 대나무와 투명천, 마끈 및 화선지 등만을 이용해 비거를 복원, 조선시대 우리의 조상들도 하늘을 날았다는 고서(古書)의 문헌내용을 실제로 입증하였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영국의 역사학자 애드워드 카(Edward H. Carr)는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fact of the past)’에 접근하기 위해, 자료에 기록된 사실인 ‘과거에 관한 사실(fact about the past)’을 재료로 삼아 연구하여 역사가 자신에 의해 재현된 ‘역사의 사실(historical fact)’을 구성해내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의 당대적 상상력의 개입에 의해 재현된 또 하나의 ‘과거에 관한 사실’인 셈이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나대용이 만들고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해전에 활용하였다는 거북선의 경우 실물이나 정확한 설계도가 전해져 오고 있지 않았지만 당대적 상상력의 개입으로 구체화되고 다듬어졌다.

그 결과 복원된 거북선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자긍심이 되었고 세계 최고의 조선업을 이루어낸 원동력이 되었으며 통영, 거제, 사천, 순천, 여수, 진도 등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평구가 만들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 전투에서 활용하였다는 세계 최초의 동력비행기인 비차에 대해 우리는 그 역사적 의미만큼의 당대적 상상력을 발휘해 왔는가?

끝으로 비차 복원 사업은 고문헌에 나타나 있는 기록을 바탕으로 당대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구체화하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고 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한다면, 거북선이 조선산업 발전의 원천이 되어 지금도 관광상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처럼, 비차가 항공산업의 원천이 되고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이 비차 콘텐츠의 주인이 되리라 생각한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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