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웅 전 진주문화원 부원장
이무웅 전 진주문화원 부원장

향기 진하게 풍기는 국화꽃은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모양도 여러 가지 탐스럽고 색깔도 샛노랗게 고우며 향기 또한 숨이 막힐 듯 진하다. 이는 물론 재래종 꽃이 더욱 그러하다. 국화꽃은 모양이나 색깔 향기 등에서 꽃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요건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국화꽃을 좋아한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가을꽃으로 가장 마음이 끌리는 것을 들라고 하면 억새꽃을 내세우고 싶다. 억새는 포아풀과의 다년초로 키가 1.2미터 정도 되는데 늦여름 쯤 자색을 띤 황갈색의 꽃을 피운다.

그러나 가을로 접어들어 만개하면 회백색이 되고 투명한 가을 햇살을 역광으로 받으며 바라보면 마치 솜꽃처럼 하얗게 빛난다. 억새꽃은 색깔도 별로지만 고혹적이지 못하며 향기 또한 없다. 그런데도 이 꽃은 혼을 빼앗는 이상한 환상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여느 꽃들의 향기도 시선을 끌지만 억새꽃은 영혼을 사로잡는다. 추수가 끝나 미쳐 따지 못한 대추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줍고 있는 대지는 황량하고 초목들이 헐벗어 회갈색으로 변하고 있는 늦가을. 산밭둔덕에 양광을 받으며 고즈넉이 피어있는 억새꽃을 보노라면 마치 오래전 세상을 떠난 옛사람의 표백된 넋이 이승에 잠깐 나들이 온 것 같기도 하다.

억새꽃은 적당한 곳에 몇 이삭 피어있는 자태도 아름답지만 숲을 이루고 있는 정경 또한 독특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몇 년 전 나는 몇몇 친구들과 진주에서 창녕에 있는 화왕산에 간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일행은 표충사에 들러 버스로 목적지까지 곧장 달리면서 창 밖에 비치는 풍성했던 대추나무 열매가 온갖 컬러를 이루며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뒤늦은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풍이 풍성한 상수리나무와 소나무 숲을 지나 우거진 숲길을 숨차게 한참 올라가자 시야가 훤히 트였다. 순간 나는 탄성을 지르며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한그루 없이 억새 숲만 아득히 펼쳐져 있는 정상 등성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두시 네 시 방향 사이에 억새들의 두듬지에는 구름 빛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성역 쪽에서 소슬바람이 불자 선현들의 말발굽소리와 승전보가, 억새꽃들은 저세상의 흰 넋들처럼 나부꼈다. 그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마치 이세상의 쓸쓸함을 모두모아 놓은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쓸쓸함도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런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색깔이 고운 대상이 주는 아름다움보다 더 절절하고 농밀한 그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억새꽃을 유난히 좋아하게 되었다.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억새꽃은 나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몹시 좋아한다.

왜 색깔도 곱지 않고 향기도 없는 억새꽃이 가을의 계절 특색이나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어 주고 있을까? 우선 모든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한 꽃의 자태가 그런 일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그러다 보면 가을은 초목이나 동물 등 온갖 생물들이 삶을 마감하거나 휴지하는 시기로 접어드는 계절이다. 그래서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든 사물이 애잔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준다.

억새꽃은 여느 꽃보다 이 같은 정서를 향기처럼 많이 풍기는 것이다. 억새꽃은 빛깔 면에서도 가을 색조와 배색이 잘된다. 가을빛으로 주조를 이루는 것은 회갈색이다. 붉고 노란 단풍색도 빼놓을 수 없지만 그것들도 시들면 역시 희갈색에 가까운 색조를 띠게 된다. 이 회갈색과 닿을 듯 내려앉은 구름 빛의 억새꽃은 더 할 수없이 잘 어울린다. 조화가 잘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뜻이고 이는 곧 미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억새꽃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나 여름에 만개 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위환경과 어울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의 섭리란 조화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이무웅 전 진주문화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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