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12만 남원성과 황석산성을 향하여

원균휘하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일본군으로서는 1차 전쟁 때 이순신에게 당했던 연전연패의 치욕을 한꺼번에 씻은 결과가 되었다. 7월 하순 정유전쟁 총사령관 고바야가와 히데아기(小早川秀秋)는 전군을 우기다히데이에의 좌군과 모리데루모도의 우군으로 나누어 곡창지대 전라도를 향하여 총진군을 명령했다.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은 75,300명으로 가도오기요마사, 구로다나가마사, 나베시마나오시게, 조오소가베모도지가, 모리데루모도이며, 우군대장은 히로시마(廣島)성주 모리데루모도다. 우군은 황석산성을 공격한 후 전주성으로 점령하고 북진하여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차단하는 임무를 받고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은 고니시유기나가, 시마쓰요시히로, 하지스가 이에마사, 우기다히데이에 등 45,800명과 일본수군 6,000여명, 총 5만2천여 명은 우기히데이이를 대장으로 하여 남원성을 점령한 후 전라도를 지배하는 임무를 받았다. 일본으로 철수하지 않고 잔류하였던 20,300명은 그대로 주둔지를 지키고 수군(水軍)은 와키자키야스하루 1,200 등 모두 7,200명으로 편성했는데 수군은 남원성 전투 후 섬진강을 통하여 바다로 돌아갔다.

좌군은 7월25일 남해를 따라서 고성 – 사천 - 하동을 경유하여 섬진강 줄기를 따라서 북상하여 구례를 거쳐 남원성을 치고 전주성에서 우군과 합류를 하기로 했고 우군은 양산 – 밀양 – 창녕 – 합천 – 안음을 거쳐 황석산성을 공격하고 육십령을 넘고 진안을 거쳐 전주성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부산에 주둔한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는 7월25일 서생포를 출발한 가도오군, 기장의 구로다군, 김해의 나베시마군 등 병력을 양산에 집결시켜 전투대형을 갖추어 밀양으로 진격했다. 밀양을 거쳐 창녕에 도착한 모리데루모도의 우군은 창녕동쪽 2km 지점에 있는 화왕산성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를 하루 밤낮을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산성을 지키는 장수는 1차 전쟁 때 제6군 안코구지 에게이(安國寺惠瓚) 의 전라도 진격을 좌절시킨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와 수많은 대소전투에서 다져진 전투경험이 풍부한 사기충천한 의병들이었다. 하루밤낮을 고민을 하던 모리데루모도는 8월3일 공격을 포기하고 그대로 지나쳤는데 필자는 모리데루모도가 왜 화왕산성 공격을 포기를 했는지를 보고 싶어 억새풀이 무성한 한 여름에 현장을 답사했다. 화왕산성의 지형적인 특징은 외곽은 접근이 쉽지 않은 절벽으로 자연적인 요새이고 성의 내부는 동서로 골짜기를 이루고 남북으로 갈라진 양쪽산면이 마주보는 V 자형의 지형이다. 양쪽에서 마주보는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산세를 이용하여 동서로 길게 겹겹이 교통호를 파고 궁사들을 배치를 하여 골짜기로 들어오는 적군을 향하여 화살을 집중한다면 일본군은 큰 손실을 당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7월25일 서생포를 출발하여 양산에서 전투대형을 갖춘 일본우군은 안음현의 황석산성에 도착하는 8월 14일까지를 후보계획(後報計劃)으로 계산을 하면 양산– 밀양– 창녕– 삼가- 초계- 합천– 거창 등 청야(淸野)작전이 시행되어 사람들이 모두가 피난을 떠난 각 경유지마다 식량을 약탈하기 위하여 지역을 정찰하느라고 3일 또는 4일씩을 주둔을 했던 것으로 판단이 된다.

황석역사연구소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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