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역사연구소장 박선호 우리 조선은 한 때 언어, 문화적으로 지배하는 강역이 전 세계를 포괄하는 국가를 경영했으나 총칼을 들고 천주교의 전파를 기도하며 황인종의 말살을 기도하는 백인들에게 밀려서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우리의 역사는 깡그리 잃어버리고 반도사관에 만족하는 영혼을 잃은 불쌍한 사람들이 되었다.16세기 이후 철기문명에 일시적으로 앞섰던 영국을 비롯한 스페인, 미국, 등 유럽의 제국주의 강국들은 시장의 개척과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력인 노예와 값싼 원료공급처로서 식민지를 확대하여 그들만의 세계를 건설 지
역사전쟁에 패하여 식민사관에 매몰된 일부의 사람들은 사지가 찢어지고, 코를 베이고, 붉은 피 흘려 나라를 지킨 조상을 폄훼하는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 없다. 결과적으로 일본인이 심어놓은 식민사관은 사랑으로 감싸주고 키워주고 자신을 이 땅에 존재케 한 부모나 조상과 조국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없는 쭉정이 후손을 만들고 있다.자신을 희생하여 가족을 지킨 조상들의 강력한 저항정신과 전투의지를 이어받지 못한 자! 자신의 역사를 잃어버린 자는 영혼이 없는 정신적인 Diaspora가 되어 부정과 부패의 유혹에 쉽게 노출이 되고 조
자동차에 깔려 죽는 아들을 본 엄마는 순간적으로 자동차를 뒤집는 괴력이 나오고 적군의 칼날에 쓰러지는 가족을 보는 아버지는 세상을 뒤집는 괴력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황석산의 정신은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정신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지극한 사랑의 힘에 훈련된 7만5천의 일본정규군이 궤멸된 것이다.5일간의 긴 전투기간 중 백사림이 일본군과 내통하고 문을 열어주고 탈출하는 그 순간까지 한명의 일본군도 성내로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정신 그것은 가족을 지키려는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힘이었다. 노약자 부녀자 등 7천여 명이 열배도 넘는
황석산성 대첩은 임진전쟁 7년 중 가장 많은 일본의 지상군이 궤멸된 전투로 일본인들이 끝까지 감추고 싶은 특급비밀이다. 5일간의 전투에서 우군 7만5천3백 명 중 2만7천명만이 전투가 가능하고 48,300명이 전사 또는 부상자로 70% 이상의 전투력을 상실한 전투로 일본인들이 기록한 내용이다. 경남거창에서 재편성이 1910년대에 실시한 총독부의 조작이라는 것만을 증명하면 잃어버린 역사 황석산성 대첩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임진전란사』의 황석산성 전투 참전일본군을 전주성에서 북진한 병력과 동일한 2만7천명으로 일치를 시킴으로써 7
이것은 모리데루모도가 사라진 이유, 전주성에서 우기다히데이에 좌군이 북진한 이유,전북산용안과 정읍회의에서 재편성한 이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지극히 일상적인군사상식을 생각지도 않고 황석산성 전투를 지우려는 일본인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고있는 것이다.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는 유군(遊軍)적 존재였다라고 한 것은 부상을 당하여 지휘는할 수 없지만, 아직도 전투현장에는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유군이란 군사적으로는게릴라나 빨찌산 유격대 등으로 표현을 하는데 우군대장이 궤멸되어 패잔병을 이끌고유격활동을 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황석산성에서 8월16일 일본지상군이 궤멸되고 9월16일 명량전투로 보급로가 끊어진 일본군은 전라도에서 철수하여 경상도 바닷가 왜성으로 돌아감으로서 4도 분할이라는 정유전쟁의 목표를 상실하였고 풍신수길에게는 소득 없는 7년간의 전쟁을 포기케 하였으며 전쟁의 참패로 지친 풍신수길은 1597년10월부터 헛소리 하다가 고황(膏肓)병이 들어 1598년 7월17일에 죽고 일본군이 철수를 함으로서 풍전등화였던 조선이 다시 살아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전쟁의 결과 명나라는 망하고 일본은 풍신수길의 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가 집권하는 등 정치에
1578년 봄 황석산성아래 교북리에 위치한 안음향교에서 거창좌수 유명개(劉明蓋)에 대한 청문회(聽聞會)가 열렸다. 안음향교의 박승신(朴承信), 임진민(林眞愍), 정창필(鄭昌弼) 등의 선비들이 “공(公)은 반상(班常)이 유별한데 조석으로 여염은 물론 노비와도 어울려 담론하면서 같이 농사일을 하는 것은 경서(經書)의 도에 역행하고 기강(紀綱)을 해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으니 사대부(士大夫)로서 징계를 받음이 마땅하다.” 라고 하여 청문회가 열렸다.이에 유명개는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사대부인 위정자(爲政者)는
조선에서는 양반들의 전쟁이 아니라, 사냥꾼, 노약자, 부녀자, 가노 등 이름도 없는 소위 말하는 상놈들이 전쟁이라고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고 일본에서는 지휘관들의 명령에 동료들의 코를 베다가 스스로 궤멸된 역사가 너무나 부끄러워 관련기록을 모두 지움으로써 조선과 일본국민을 동시에 속임으로서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은 사라졌다.오늘을 사는 우리는 조선국민의 저항정신과 전투의지를 말살시키는 식민사학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 세뇌된 편견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일고의 작은 가치들을 더하여 조선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키우는 세뇌탈출을 해야 할 것
어떤 단체장은 선생님의 연구는 학문적인 연구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학문적인 연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모호한 말로 필자에게 학문적인 연구까지 다해주기를 기대하거나 아예 지원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학문적이라고 하면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생성에서부터 과거, 현재, 미래를 역사,지리,문화,경제,정치,사회,교육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전부 분석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필자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역사를 모르거나 전쟁이라는 것을 모르면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다.역사를 바꾼 거대한 물줄기 황석산성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잃어버린 억울한 역사를 누군가가 어리석은 안목으로 순간적으로 이용만 하려든다면 진실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 질 수 있다. 황석산성 전투 학술회에서 황석산성의 진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배제하고 엉뚱한 사람이 주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케 한 사람, 영혼(靈魂)이 빠진 사람들의 부정과 부패는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거대한 흐름을 방해하고 저지하려는 식민사학자나 역사를 조작한 일본인보다도 더 큰 내적장애물이 아닌가 생각된다.어떤 단체장은 지역의 거대한 역사를 연구하는데 지원은커녕 무엇을 해야
중국 서안의 장안성이 고구려의 제1의 평양성이고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배경이 바로 장안성이다. 왕건의 무덤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정릉이고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무덤은 중국 절강성임해현김해부에 있고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무덤이 중국 하남성낙양현의 십리하 북망산에 있고 신라 27대 선덕여왕과 31대 신문왕의 무덤은 사천성 동쪽 낭산(狼山)에 있다. 무덤의 주인들이 그곳 현지인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당연히 존재할 수 있는 뚜렷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상들은 위대했고 찬란했는데 일본이 방해를 하고 중국이 감추어서 후손인 우
역사에 대한 전문가도 아닌 필자가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를 했지만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간의 수많은 비바람도 있었고 장애물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나름대로 열정을 다하여 연구를 지속한 것은 황석산성(黃石山城) 실적(實績)을 쓰신 지족당 박명부님의 말씀대로 먼 훗날 훌륭한 역사학자가 태어나서 잃어버린 역사적 진실을 찾아 대한민국의 정사로 정립되는 그날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고자 함이다. 즉 後日 太史氏 長大之 一助의 그날을 기다린다.특히 太史氏 즉, 큰정치가(太政治家), 큰행정가(太行政家)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도 식민사관에 빠진 줄도 모르는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이 7만5천3백 명을 궤멸시킨 4만8천3백 명은 사상자가 되게 한 영웅이라는 글자나 표현은 한 곳도 없고, 2만7천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한명도 잡지 못한 형편없는 못난 조상이라고 조종도의 대소헌 문집, 곽준의 존재실기, 황석산성 곳곳, 황암사 사당에 황석산성 대첩의 기념비가 아닌 엉터리 비석(碑石)마저도 황석산성에서 싸운 우리 조상 못난 조상이라고 욕을 지속함으로서 각 집안에서는 가위눌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사실들을 언
일본국사대사전상의 일본군 기동로 일본 우군이 경남의 거창에서 중간 목표인 황석산성을 앞에 두고 적전분열을 하는 재편성을 실시하여 본대는 황석산성을 지나서 먼저가고 뒤를 따르던 가도오기요마사가 육십령 고개를 올라가다가 황석산성에 안음거창함양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와서 공격을 하였다라고 조작하였다. 일본국사대사전은 1887년에 창간을 하였기 때문에 국사대사전의 기록은 1910년대에 했다는 것이 증명되고 이러한 조작에 총독부가 깊이 관여하였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또한 1597년 4월18일에 거창에서 일본첩자를 체포
또한 1597년 4월18일 황석산성을 정탐하는 일본의 첩자 3명이 거창에서 체포될 정도로 수십여 명의 첩자를 운용하여 사전 충분한 정보를 수집한 후 작전을 하는 중인데 전쟁의 신이라고까지 추켜세웠던 가도오가 황석산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육십령을 올라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황석산성을 공격하는 어리석은 장수로 매도하는 것은 지극히 조잡한 날조다.1910년대 대한민국을 다시 침략한 일본군은 황석산성 대첩의 역사적 사실에 경악을 했을 것이다. 오래 동안 일본의 통일 전쟁에서 잘 훈련된 7만5천의 일본 정규군이 군인도 아닌 조선의 부녀자
1967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에서는 황석산성에서 일본우군 75,300명이 궤멸된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조작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 왜곡은 1597년 그 당시가 아닌 일본제국주의 시대인 1910년11월 조선의 구제도와 구관습을 혁파한다는 명분아래 헌병을 앞세워 조선의 역사서를 모두 수거하여 수정할 수 있는 것은 수정하고 수정할 수 없는 것은 불태웠던 조선사편수회 사건 이후의 일이다.2016년 11월 16일 함양군 학술회에서 해양대학교 김강식 교수가 임진전란사의 1002〜1007페지를 인용하
1578년 봄 황석산성아래 교북리에 위치한 안음향교에서 거창좌수 유명개(劉明蓋)에 대한 청문회(聽聞會)가 열렸다. 안음향교의 박승신(朴承信), 임진민(林眞愍), 정창필(鄭昌弼) 등의 선비들이 「공(公)은 반상(班常)이 유별한데 조석으로 여염은 물론 노비와도 어울려 담론하면서 같이 농사일을 하는 것은 경서(經書)의 도에 역행하고 기강(紀綱)을 해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으니 사대부(士大夫)로서 징계를 받음이 마땅하다.」 라고 하여 청문회가 열렸다.이에 유명개는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사대부인 위정자(爲政者)는 백성에게 의존하는 것
황석산성 대첩은 임진전쟁 7년 중 가장 많은 일본의 지상군이 궤멸된 전투로 일본인들이 끝까지 숨기도 싶은 특급비밀이다.. 5일간의 전투에서 우군 7만5천 3백 명 중 2만7천 명만이 전투가 가능하고 48,300명이 전사 또는 부상자로 전투력을 완벽하게 상실한 전투로 일본인들이 기록한 내용이다. 그 증거는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의 황석산성 일본군의 전투편성표』, 『일본국사대사전의 기동로』, 『전주성에서의 깃가와히로이에의 코베기 보고서』, 종군승 멘고렌조보의 『고려일기(高麗日記)의 1〜2차 재편성표』와 『나베시마나오시게가문의 기록』
일본인을 조선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조선인을 말살시키는 침략목적은 임진전쟁이나 정유전쟁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정유전쟁에서는 더하여 조선사람 코 3개를 벤 후에는 포로를 잡아서 팔고 돈을 벌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 특징이다. 임진전쟁에서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갔으나 풍신수길의 논공행상이 없자 정유전쟁에서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논공행상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은 장군이나 병사나 조선 사람의 코를 베는데 집착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투 중 일본군은 조선인과 명나라의 군인은 물론, 전사한 동료나 부상자들의 코까지도 무자
일본군 전주성에서 야전병원(野戰病院) 운영 북동문의 일본군 구로다의 병력은 1만 명중 9월5일 북진 중에 보고한 구로다의 코베기 보고서에 나타난 3천명은 황석산성에서 전사한 자이고 직산전투에 3천명을 데리고 올라가는 중임으로 4천명이 부상을 당하여 70%가 사라진 상태로 구로다부대는 궤멸이 되었고 남문을 공격했던 모리데루모도 대장군과 조오소가베모도지가군 4만3천3백명은 완벽하게 궤멸을 당했다. 모리데루모도대장부대원 3만 명중, 코베기 보고서에 나타난 18,350개의 숫자를 미루어 보면 조선군 의 코 7천개를 제외한 숫자 11,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