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 저자 박선호

일본군 전주성에서 야전병원(野戰病院) 운영

 

북동문의 일본군 구로다의 병력은 1만 명중 9월5일 북진 중에 보고한 구로다의 코베기 보고서에 나타난 3천명은 황석산성에서 전사한 자이고 직산전투에 3천명을 데리고 올라가는 중임으로 4천명이 부상을 당하여 70%가 사라진 상태로 구로다부대는 궤멸이 되었고 남문을 공격했던 모리데루모도 대장군과 조오소가베모도지가군 4만3천3백명은 완벽하게 궤멸을 당했다. 모리데루모도대장부대원 3만 명중, 코베기 보고서에 나타난 18,350개의 숫자를 미루어 보면 조선군 의 코 7천개를 제외한 숫자 11,350여 명은 모리데루모도부대의 전사자이며. 긴급북진부대인 구로다에게 지원된 병력은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를 포함 2,000명이고 나머지 16,650명은 부상자다. 모리데루모도부대는 그야말로 90%에 가까운 완벽한 궤멸이다. 조오소가베는 전주성에서 북진에 한명도 지원을 하지 못했으니 13,300중 코베기 보고서에 나타난 6,040명은 전사이고 나머지 7,260여명은 부상자로 100% 궤멸이다.

또한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는 본인들이 부상을 당하여 식물인간이 되고 8개월간이나 지휘관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모리데루모도는 황석산성에서 힘깨나 쓰는 젊은 날쌘 무사들을 모두 잃고 일본국의 판도를 뒤집은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한 원인을 제공한 황석산성은 토요토미히데요시와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가문이 몰락하고 자자손손 일본인들에게 지옥중의 지옥(地獄)으로 기억되는 곳은 황석산성 이었다.

전주성을 향하여 진격을 할 때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은 20일에 입성을 하는데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은 8일이나 걸려서 25일에 입성을 한다. 지휘관이 건재한 구로다, 가도오, 나베시마는 24일의 전주성 재편성회의에 참가를 하지만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는 참석하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서 길도 없는 산길을 따라 육십령을 넘고 진안을 거쳐 25일에야 전주성을 들어갔다. 이때 황석산성에서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일본군은 피아 구분 없이 전사자의 시체를 해체하여 먹거리로 만들어 짊어지고 전주성을 향하여 지친 패잔병이 장관을 이루는 아수라의 길고도 지루한 행군을 진행했다. 이렇게 굶주리고 부상당한 병력이 모리데루모도 16,000여명, 조오소가베 7,000여명, 구로다4,000여명, 좌군 부상자 등, 3만여 명의 부상자들은 의료진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주성 이곳 저 곳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8월 20일 전주성에 입성한 종군승이며 군의관인 게이넨(慶念)의 일기 중, 「21일 여기저기에서 약을 요구하는 사람이 끊이질 않고 왕진을 요구하는 사람도 많다. 부상자들이 저마다 고통에 겨워 아우성을 치는 병사들로 가득하구나. 이내몸이 하나임이 한스럽네.」 라고 가록하고 있다.

이 게이넨(慶念)의 일기는 아직 황석산성을 공격한 모리데루모도 우군 부상자들이 도착하기 4일 전인 21일이다. 황석산성의 부상자들은 25일이 되어서야 두 대장 부상자와 함께 겨우 살아남은 2만 수천여명의 부상자가 전주성으로 들어가니 게이넨의 야전병원(野戰病院)은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게이넨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수많은 부상자들의 치료를 팽개치고 28일 긴급북진을 하는 가도오를 따라서 전주성을 떠나 버렸다.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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