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선성 전투를 포기하고 조선의 내륙 심심산골인 안음현의 황석산성을 식량창고로 작정한 일본군은 일본군이 산성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인 조선 백성들이 성을 비우고 도망을 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철저하게 훈련되고 준비된 전투를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가 없었다.

일본군이 황석산성을 정찰한 결과 각 문별로 상호지원이 불가하여 병력의 2/3인 4만여 명을 남문에 집중 배치하고 각문별로 독립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북문의 거창사람들과 서문의 함양사람들이 남문의 안음사람들을 지원할 수 없도록 고착시키는 작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대군이 투입되어도 조총을 사격할 수 있는 남문성벽 앞에 이르면 결국은 1천명 이하의 소규모 병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높이 3m 이상의 성곽은 일본군이 성의 내부를 관찰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이 일본군이 궤멸당하는 요새(要塞) 황석산성의 지형적인 특성이다. 활은 쏘는데 2〜5초밖에 걸리지 않고 내려다보면서 하향 사격하는 조선군의 활은 발사속도가 1분이나 걸리고 위로 올려다보면서 상향사격을 해야 하는 조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우세였다.

비록 조선군의 활은 장군들이나 왕들이 사용하는 물소 뿔로 만든 각궁(角弓)은 없었지만 산뽕나무로 만든 목궁(木弓)이나 대나무로 만든 죽궁(竹弓)으로도 충분하였고 활의 크기는 2m이하의 반궁(半弓)이었으나 산악전투를 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15일 아침부터 시작된 황석산성의 본격적인 전투는 18일 백사림이 탈출하는 순간까지 전투는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조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7만5천이라는 대군을 맞아 싸우기에는 안음, 거창, 함양이라는 심심산골에서 동원한 물자로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일본군은 27,000명이나 살아 도망을 갈 수 있었다. 임진전란사에서 일본인들이 주장한대로 황석산성에 참전한 일본군이 27,000명이었다면 일본군은 황석산성에서 몰살을 당하여 전주성은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화살이 5만발만 더 있었어도 일본군은 황석산성에서 한명도 돌아갈 수 없었다.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들이 보고한 코베기의 숫자는 그들의 전사자와 비슷한 숫자가 된다. 모리데루모도 우군대장의 부하요 모리가문의 집사인 깃가와히로이에가 전주성에서 부상자 치료 중에 보고한 코의 숫자는 9월1일 18,350개이며 여기에는 황석산성에 입성하여 전사한 조선군 7,000명을 포함한다. 9월26일 보고한 것은 10,040개로 궤멸된 부대가 전투를 할 수 없었고 가지도 않은 영광군에서 베었다라고 허위보고를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황석산성에서 부상을 당하고 전주(全州) 야전병원(野戰病院)과 전라북도와 남도로 이동 중에 죽은 모리데루모도의 부하들임이 틀림없다. 조선 사람뿐만 아니라 명나라 군인과 일본의 수만 젊은이들의 코를 벤 코베기 명령을 내린 풍신수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후 아들마저 자살을 함으로서 피붙이라곤 남김없이 사라진 것은 코베기라는 잔인한 명령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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