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하영갑

우리나라에는 4계절의 풍광이 있어 좋아요. 봄에는 봄꽃의 향기 속에 우아하게 피어나는 아지랑이 속 쑥 캐는 아낙이 있고. 찌는 듯한 여름에는 짙은 녹색의 춤사위와 쪽빛 파도의 속삭임에 편안한 마음을 열 수 있어 좋고. 떨켜 끝에 매달린 울긋불긋한 단풍 촘촘히 열린 가을엔 얄팍한 코트 깃을 세우고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걸을 수 있어 좋고. 눈 내리는 겨울이면 군고구마에 따끈한 차 한 잔이 있어 좋은 나라지요.

욕심 찬 하루하루의 생활에 시달려 밥 때도 잊은 채 궁색을 떨었던 날들을 모아 이룬 그 것과 거기. 그토록 애 쓴 결과로 몇 가지 결실들을 만들어 냈을 때의 작고 큰 환희. 그것이 진정한 당신의 행복이었을까요? 그동안 그대 주위에 알게 모르게 닥아 왔던 달콤 매캐한 과객들을 기억하나요. 그들과의 만남 뒤에는 따갑고 쓴 메아리들이 국수사발 속의 면발처럼 빨려들었다가 황급히 빠져나가곤 했지요. 그 면발을 담근 따끈한 해물 육수가 파도 되어 들락거렸고 허기진 그대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기운도 넘쳤지요. 하지만 당시 그대의 무심(無心)한 편애(偏愛) 속에는 작은 풍광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떠나고 만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힘들게 걸어왔던 여행길에는 부질없는 흙바람만 불었고 발끝에 차이는 자갈돌은 제 기능을 잃은 채 길 가장자리 수로로 굴러 떨어졌으며 지나가는 자동차도 경적만 울린 외로운 길, 텅 빈 풍광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자신이 가진 멋이나 맛이라고는 누구도 평할 수 없으리만큼 미미했기에 좁은 오지랖에는 찬바람만 스치는 외관이었지요. 계란 일곱 꾸러미를 서 너 개 남기고 다 먹어가니 이제야 소견머리가 드네요. 지금까지 내 가슴엔 부드러운 바람이 일지 않았고, 작은 장난감이나 나무 지게 하나 만들 수 있는 재주도 없었으며, 무더운 여름 시원한 폭포수 같은 말솜씨도, 스치면 피어나는 향긋한 향기, 반짝이는 별 빛 같은 매혹적인 눈동자도 없었기에 푹신한 안락의자 하나 장만할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잠옷부터 트레이닝 외출복까지 덕지덕지 붙은 과욕과 허세를 집 앞 영천강물에 깨끗이 빨아 말려 입었으니까요. 지금껏 차가웠던 내 마음 바닥에서는 결코 작지 않은 야생화 몇 송이가 피고 있으며 그 한 가운데 모란 꽃 송이도 맺었답니다. 곁눈 돌리기도 힘든 복잡한 세상 속 볼 폼 없는 나무 밑 낡은 의자에라도 앉아 주고받을 수 있는 작은 추억과 말거리가 나에게 남아있으니, 이젠, 비록 이 작은 풍광 속으로라도 매미나 귀뚜라미 몇 마리는 찾아 들어 놀겠지요.

지금 그대는 어떤 풍광을 만들고 있나요?

주: 그 것 - 재물, 거기 -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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