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숙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에도 시대 쓰시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일거에 높아진 계기는 1990년 5월의 일이다.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궁중 만찬회에

서 “270년 전 조선과의 외교에 관여한 아메노모리 호슈는 ‘성신誠信과 신의信義의 교제’를 신조로 했다”라며,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구축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에도 시대 조·일 관계 연구자가 아니면 잘 알지 못하던 일본의 역사인물을 한국의 대통령이 언급했으니, 아마도 평범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호슈가 누구지?’하며 어리둥절했으리라.

국정 운영으로 다망했을 노태우 대통령이 한일 학계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어떻게 발굴해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호슈는 들여다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인물이다. 조일 통교 업무를 경험한 실무자이자 지식인으로서, 통교의 교본을 다수 저술하여 쓰시마의 조선 외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의 통칭은 ‘도고로藤五郎·東五郎’, 교토에서 병원을 개업한 의사 아메노모리 기요노리雨森淸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업을 이어 의사가 되려고도 하였으나 당시 교토 학풍의 영향을 받아 유학자의 길로 전향, 1685년 에도로 가서 주자학자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에 들어갔다.

동문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무로 규소室鳩巣 등과 함께 ‘木門의 오선생五先生’으로 존칭 되었던 호슈는 스승인 준안의 추천을 받아 1692년, 쓰시마 번청으로부터 봉록을 받는 유학자 생활을 시작했다. 쓰시마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2회에 걸쳐 나가사키로 유학하여 중국어를 배웠고, 조선의 부산 왜관에도 건너가 조선어를 익혔다. 왜관에 있는 동안에는 조선이 펴낸 일본어 사전 『왜어유해倭語類解』 편집에 협력했고, 그 자신도 조선어 입문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를 저술했다.

1698년, 조선담당부서朝鮮向御用의 좌역佐役, 주무관에 해당에 임명되었고, 1702, 1713, 1720년에는 쓰시마가 조선에 파견하는 임시 사절의 도선주都船主, 使者의 용무 담당로, 1728년에는 조선 쌀 수입의 연장 교섭을 위해 왜관에 건너갔다. 1711년과 1719년 통신사행 때에는 쓰시마번의 ‘진문역眞文役, 외교문서 담당’으로 통신사 일행을 에도까지 수행하기도 했다. 1721년, 조선 인삼 밀수입에 긍정적이던 번청에 불만을 품은 호슈는 조선 담당 부서를 사임하고 가독家督을 장남에게 물려주었다. 1729년 특사가 되어 왜관에 건너간 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조선행이 되었다. 그리고 1734년에는 쓰시마의 내정에 관한 상신서 『치요관견治要管見』과 『교린제성交隣提醒』을 저술했다.

앞서 말한 前 대통령의 연설 덕분인지 호슈는 ‘성신지교誠信之交’를 설파한 조일 우호의 상징적 인물로 인용되곤 하지만, 실제 그의 인물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1711년 통신사행 때 아라이 하쿠세키가 통신사 의례 개혁을 강행하려 하자 호슈는 하쿠세키와 대립했다. 또한 막부 정책에 의해 쓰시마의 조선 수출용 ‘일본 은’의 순도가 낮아져 조선 상인들이 조선 인삼판매를 거부하며 항의하자 호슈는 조선 측 요구에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막부나 조선을 상대로 하는 갈등국면에서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쓰시마번의 봉록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처신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메노모리 호슈의 ‘성신지교誠信之交’조일 통교에 대한 호슈의 인식은 『교린제성交隣提醒』에 집약되어 있다. 『교린제성』은 61세가 된 호슈가 자신의 실무 경험을 집대성한 책으로, 번주 소씨宗氏에게 올리는 의견서이다. 그 유명한 ‘성신지교’란 『교린제성』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로, ‘성신이란 실의實意를 말하는 것인데 서로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진실로써 교제하는 것을 성신이라 한다’는 문장이 인용되어, 이것이 조일 관계에 대한 호슈의 우호적인 인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이 문장 바로 뒤에는 ‘조선과 진실로 성신지교를 행하려면 쓰시마에서 보내는 송사送使를 모두 사퇴하고 조선의 접대를 받아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쉽게 성사될 수 없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일견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호슈가 『교린제성』을 저술한 이유를 힌트로 삼아야 한다. ‘교린’이란 ‘이웃 조선과 교류하는 것’이고, ‘제성’이란 ‘주의注意를 환기하다, 암시하다’라는 의미이다. 호슈가 이 책을 집필한 동기는 단순히 ‘조선과 교류하는 기술’을 정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양국 간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사례로 들어 주의를 환기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취할 수 있도록 암시를 주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시대의 풍조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쓰시마번 당국에 커다란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은 임진왜란 직후 얼마간은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위세’를 두려워했고, 쓰시마는 그런 조선을 업신여겨 종종 위압적, 폭력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곤 했다. 호슈는 이를 ‘난후의 여위亂後의 余威’라 표현했는데, 임진왜란으로부터 이미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난후의 여위’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같은 위압적 방식을 고수하다 외교의 장에서 패착하여 갈팡질팡하곤 하는 쓰시마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호슈가 말하고자 했던 ‘성신’이란 추측건대 조일 양국의 외교와 무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상대의 실상과 시대의 풍조를 읽어서 최선의 방책을 찾아내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했던 듯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말하는 ‘성신지교’가 단순한 장밋빛 이상론이 아니라 치열한 외교 경험의 산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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