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최근 연구총서 를 펴냈다. 이 책은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건국된 발해국의 멸망과 그 이후 200 여 년 동안이나 부흥운동을 전개한 불굴의 사람들, 발해 유민에 대한 기록을 새롭게 검토한 것이다.‘해동성국’으로 불리며 발전했던 발해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거란(요)의 공격을 받아 하루아침에 멸망한 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은 926년 1월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포위되자 흰 옷에 새끼줄로 양을 끌
1811년 통신사는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마지막 사행이었으며 의례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었다. 사행단의 최종 도착지는 쇼군이 있는 에도가 아닌 쓰시마로 변경되었고, 사행단의 규모도 총인원 320여 명(혹은 330여 명)으로 종래에 비해 대폭 감소하였다. 이 통신사는 ‘도쿠가와 이에나리家齊의 쇼군 계승 축하’를 명분으로 했는데, 방일은 이에나리가 쇼군직에 오른 1787년으로부터 무려 24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일본의 사회 불안도 심각해서 18세기 후반 ‘텐메이天明
마상재란 조선시대 무예 24가지 기술 중의 하나로, 사람이 달리는 말의 등에 서거나 눕는 등 갖가지 아크로바틱한 자세를 취해 보이는 기예이다. 마상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보이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행해졌는데, 유교사회였던 조선왕조는 마상재를 무예보다는 놀이로 인식하여 격구擊毬, 기사騎射, 기창騎槍 등 실전용 기마 무예를 강조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중 마상재가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마상재는 종래 유희를 겸한 군사 훈련의 수단에서 독자적인 무예로 발돋움했다.이제는 몇 장의 그림을 통해
에도 막부는 신의를 통할만 한 상대인가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豊臣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정치체를 에도江戶막부幕府로 부른다. 정권 장악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국교를 요청했고, 조선은 고민에 빠졌다. 조선은 오랜 내부 논의와 교섭 끝에 에도 막부와의 국교를 결정하고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기로 했다. 1607년의 사절은 임진왜란 이후 첫 번째이자, 에도 막부와의 새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서로 신의를 통한다는 의미의 ‘통신사通信使&rs
에도 시대 쓰시마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대중적인 인지도가 일거에 높아진 계기는 1990년 5월의 일이다.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궁중 만찬회에서 “270년 전 조선과의 외교에 관여한 아메노모리 호슈는 ‘성신誠信과 신의信義의 교제’를 신조로 했다”라며,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구축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에도 시대 조·일 관계 연구자가 아니면 잘 알지 못하던 일본의 역사인물을 한국의 대통령이 언급했으니, 아마도 평범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호슈가 누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 쓰시마, 시모노세키下關, 도모노우라鞆浦, 우시마도牛窓, 오사카大坂, 교토京都, 나고야名古屋, 시즈오카靜岡를 거쳐 에도막부의 쇼군이 거하는 에도江戶에 이르는 왕복 약 8개월이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흔히 통신사는 문화사절단이기도 했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 조선인들이 사행록을 남겼듯이 조선의 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본인에게 사절단 일행과의 접촉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조선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통신사 일행의 구성원은 다양했다. 사절단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삼사三使
통신사와 일본 측의 신경전1590년의 통신사는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긴장된 분위기 속에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는 조선 국왕이 직접 일본에 와서 항복의 예를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쓰시마對馬 측에서는 이를 ‘새 국왕의 즉위를 축하해달라’는 요청으로 바꾸었다. 이후 일본 측은 조선의 연해를 침략한 왜구倭寇 두목을 잡아 보낸다거나, 왜구에게 잡혀간 조선인을 송환하는 등 우호적인 자세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통신사를 요청하기 위해 온 일본 사절의 태도는 꽤 고자세였다. 통일된 일본의
140여 년 만의 ‘통신사’통신사는 대등한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상징한다. 조선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의 쇼군將軍에게 통신사를 파견한 바 있었다. 그러나 1443년 이래 통신사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의 오랜 센고쿠시대戰國時代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종결되었다.1587년, 히데요시는 규슈九州 지역 제패를 눈앞에 두었다. 규슈 지역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시마즈島津 가문은 그에게 결국 굴복하였다. 이제 일본에서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세력은 오다와라小田原 의 호조北条 가문 정도였다. 한
‘조선통신사’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인 막부 쇼군 또는 히데요시에게 파견된 공식 외교 사절로, 쇼군의 즉위 축하, 일본의 태평泰平 축하, 외교적 현안 해결 등을 목적으로 했다. 조선통신사라는 표현은 연구자들이 채용한 학술 용어다. 사료상으로는 ‘信使’, ‘통신사’,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조선내빙사朝鮮來聘使’, ‘조선빙례사朝鮮聘禮使’ 등으로 칭했다.오늘날 조선통신사라 하면 흔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의 통신사
1.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자가당착당초 일본은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워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고유영토론’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측의 주장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논리, 즉 무주지여서 편입했다는 주장과 옛날부터 자국의 영토였다는 주장을 억지로 결합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앞서 본 바와 같이 17세기 이래 일본 스스로 몇 차례나 독도가 자국의 영토가 아님을 인정한 명백한 역사적 증거가 있다. 이러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과 증거
1.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 회복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한국은 독도를 포함한 과거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들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돼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1945년의 포츠담 선언은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확인하며, &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