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박사 서승조

진주층이라는 이름은 1910년에 일본학자 다데이와(立岩)가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그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한반도에 건너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지질조사를 하였다. 미개척지인 조선 땅의 지질자료를 파악하여 각종 토목공사나 건축사업의 기초 자료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광물 자원을 발굴할 근거를 찾으려고도 했을 것이다.

그는 대구, 왜관, 영천, 경주를 중심으로 지질조사를 하여 5만분의 1 축적의 지질지도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대구 서쪽을 지나는 회색 내지 검은색의 사암(쇄설성퇴적암碎屑性堆積岩으로 주로 기존암석의 쇄설물이 쌓여 굳어진 암석이며 사립(砂粒)이 모여 굳어진 암석으로 일반적으로 석영 ·장석 ·운모 ·각섬석 등의 광물 및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과 셰일(shale. 알갱이의 크기가 진흙과 같이 작은 것이 굳어져서 된 암석인 이암 중에서 층리가 얇게 관찰되는 암석)이 교대로 쌓인 지층의 이름을 그곳으로부터 100km 이상 떨어진 진주의 이름을 따서 진주층이라 붙였다.

1910년 당시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였고, 서부경남 농업의 중심지여서 이름을 붙인 다데이와는 틀림없이 이곳까지 다녀가기도 했을 것이다. 지층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특징을 잘 나타내는 지역의 지명을 따게 되는 법이다. 이때 한 지점을 정하여 표식지로 삼게 되는 것인데, 진주층의 표식지가 된 곳은 뒤벼리 절벽이 있는 곳이다. 곧 진주층의 가장 대표적인 곳이 진주의 뒤벼리라는 말이다.

남강변에 보이는 퇴적암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래알갱이가 보이는 층과 그렇지 않는 층이 교대로 되어 있다. 모래가 보이면 사암이고 안보이면 셰일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성질의 지층으로 구성된 두께 약 100m 되는 이층을 진주층이라 이름을 붙였다. 진주층은 동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어 땅 표면에서 보면 좁은 띠를 만들어 남해안 서포 앞바다에서 시작하여 대략 북북동 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대구근처부터는 거의 정북 쪽으로 안동 낙동강 남쪽까지 이어져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진주층이라 해서 진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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