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예술고, 단국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16살 만난 하상우 선생께 가르침 받아
2014년부터 진주별 미술교습소 운영해
“그림, 좋은 친구이자 연인 같은 존재”

김규비 작가는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지쳐 고향 진주로 내려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김규비 작가는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지쳐 고향 진주로 내려와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진주 출신 여성작가 김규비 씨는 올해 30살, 1989년생이다. 단국대학교 서양화과를 전공한 김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생활하다 고향 진주가 좋아 내려왔다. 김 작가는 진주 상봉서동에서 태어나 진주중안초등학교, 진명여자중학교, 경남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그리기, 만들기 등 미술을 좋아했던 그녀는 일찍이 본인이 가야할 길이 미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중학교 졸업 후 경남예고에 진학, 이후 단국대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김규비 작가는 16살 중학생 때 부모님이 보내준 미술학원에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그곳에서 자신의 은사, 하상우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하 선생의 가르침 아래 예술인으로서 가치관, 자세나 마음가짐, 에너지 등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며 조금씩 성장했다. 하 선생의 가르침과 그녀의 재능이 만나니 더욱 빛을 발했다. 덕분에 우수한 성적으로 경남예고에 진학해 학년 내내 상위권을 유지했다. 그녀는 그 인연을 소중히 여겨 지금도 꾸준히 하 선생과 교류하고 있다. 그녀는 하 선생을 만난 것은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말했다.

김 작가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지할 곳 없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고향 진주가 생각났다. 특히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녀는 대학시절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경제적 자립을 위해 사회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놓지 않기 위해 사회생활도 미술업계에 종사하며 그림을 계속 그렸다. 하지만 그 작품은 본인의 것이 아닌 남을 위한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 활동을 위해 이름도 김명희에서 김규비로 개명했다. 김명희란 이름은 작가로 활동하기엔 동명이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2017년 여름엔 자신만의 기법을 발견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외에도 2014년 11월 그녀는 하 선생처럼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전하고 싶어 ‘진주별미술’ 교습소 운영도 시작했다.

힘들어도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그녀. 본인의 그림이 꾸준히 공유되고 보여지고 싶다는 그녀. 인터뷰 끝자락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활동이니까”

김 작가는 신진작가 공모전을 통해 서울 탑골미술관에서 ‘도약의 단초’ 전시를 했다. 사진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관람객들과 소통하는 모습.
김 작가는 신진작가 공모전을 통해 서울 탑골미술관에서 ‘도약의 단초’ 전시를 했다. 사진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관람객들과 소통하는 모습.

 

-언제 작가가 됐나.

△작가란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도 나만의 작품을 만들었으니 초등학생 때부터.(웃음) 서울에 있다가 2014년 9월 진주로 내려와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왜 진주로 내려왔나.

△단국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4년정도 있었는데, 낯선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자연스레 진주가 떠올라 내려왔다.

-고향이 진주인가.

△그렇다. 진주 상봉서동에서 태어나 진주중안초등학교, 진명여자중학교, 경남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단국대 서양화과에 진학하며 진주를 떠났다.

-서울에서 생활하다 진주에 내려온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텐데, 계기가 있나.

△대학시절 나의 작품을 수없이 만들었다. 졸업 후에도 미술계 쪽에서 일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그 작품은 내 그림이 아닌 일적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니 내 작품을 만들 환경 및 여건이 안됐다. 그래서 나의 작품을 만들고 싶단 생각과 서울생활에 심신이 지쳐있던 타이밍이 운좋게 맞아 떨어져 고향에 내려올 결심을 했다. 작가 홛동을 위해 이름도 개명했다.

-왜 개명했나.

△스스로를 알리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데, 동명이인이 많아 특색이 떨어진다는 판단이 들었다.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개명을 했다. 개명 전 이름은 김명희였다.

-작가로서 힘든 점은 없었나.

△힘들다기보단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 첫 작품 이후, 그동안 참았던 욕망과 열정이 폭발하면서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기법을 발견하기도 했다.

경제적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작품 활동이 힘들기 때문에 공모전을 많이 참가했다. 공모전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것 같다. 무관심이 가장 힘든 법이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공모전을 통해 많은 연락이 와 힘을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지원을 받고 많은 전시를 할 수 있었다.

-발견한 기법은 무엇인가.

△명칭은 따로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마블링 기법(미술 표현의 한 기법이며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이지 않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우연의 효과를 살려 작품을 제작하는 기법)에 가깝다.

-언제부터 그 기법을 적용했나.

△2017년 여름부터 그 기법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 기법을 이용한 첫 작품은 무엇인가.

△이 기법 자체가 이리저리 연구하며 점차적으로 바뀐 기법이라 어떤 작품이 이 기법으로 만든 첫 작품이다 딱 말하기 애매하다. 굳이 뽑자면 ‘Fantasy’라는 작품이다.

‘Fantasy’는 작년 여름 많은 양의 작업을 풀어내기 전 한창 헤매던 때 만든 작품이다. 하지만 헤매면서 연구, 공부가 돼 나에게 훌륭한 영양분이 된 작품이다.

현재 기법을 활용한 작품들을 경남 진주시 신안동 27-27에 위치한 윈드밀 카페서 5번째 개인전을 통해 전시하고 있다. 진주에선 첫 전시다.

 

김 작가가 본인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moony lolipop’. 원생이 달사탕 같다고 말해 붙여진 이름이다.
김 작가가 본인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는 ‘moony lolipop’.
원생이 달사탕 같다고 말해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 애장하는 작품이 있다면.

△모든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moony lolipop’이 가장 마음에 든다. 영감을 가장 크게 받았을 때 나온 작품이다. 작품이름도 원생이 달사탕 같다고 해 그렇게 지었다. 보는 이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줄 때가 좋다. 사람들의 생각은 각기 다 달라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어 재미있다. 그림으로 소통하며 여러 생각들을 확장하고 공유하는 시간이 행복하다.

내가 계획한대로 나온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계획한 것처럼만 진행되면 내 생각의 틀 안에서 멈춰지지만 이 기법을 사용하면 내가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또 그 결과로 인해 계획보다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을 그릴 때 추구하는 세계관은.

△현실과 비슷하면서 몽환적, 환상적 느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는 것을 추구한다.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작업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초점을 맞췄다.

답답함과 공허함이 나를 뒤덮을 때 나를 쏟아붓 듯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서 자유를 느끼고,그림과 소통해 내가 누구인지, 뭘 해야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 같다.

-작업은 어떻게 이뤄졌나.

△먼저 상상 속의 유토피아에서는 어느 것 하나 배척하는 것 없이 서로 조화를 이루리라 생각했다. 이 생각은 아크릴물감, 서로 융화 되지 않는 오일을 섞어 백작업을 하는데 영감을 주었다. 붓이 스치면서 미세한 구멍과 얼룩덜룩한 길을 만들었다. 이는 1차 백작업한 바탕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로 섞이지 않는 재료들이 도리어 전체적으로 환상적인 느낌을 주며 조화를 이루었다.

이때 물감의 양을 넉넉히 해 캔버스가 젖어있는 상태에서 아크릴물감을 뿌리거나 락카를 힘없이 뿌리는 기법을 전개했다. 젖어있는 배경작업 위에 뿌리는 기법의 효과는 물감이 완전히 섞이지도, 분리되지도 않는 것이다. 물감이 살며시 번지며 주변에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캔버스에 뿌려진 물감은 금방금방 변화되어 작업하는 매순간마다 생동감, 신비감을 자아냈다. 이렇게 탄생한 캔버스 속 자연세계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에너지로 충만한 유토피아를 표현한다.

-나에게 그림이란.

△마음이 복잡할 때 위로해주고, 기쁠 때도 행복을 함께하는, 나와 소통해주는 좋은 친구이자 연인 같은 그런 존재다.

-좋은 친구이자 연인 같은 존재라, 속 썩일 때는 없나.

△분명 작업하는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림에 쏟아 부은 에너지 그 이상으로 다시 에너지를 받는다. 이 그림에서 받은 특별한 에너지는 삶 자체에 생기를 준다. 사회생활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행복하다.

또 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보통 사람들은 본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 이에 반해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원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자주 갖는다. 작업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간이 많다. 그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혜택인 것 같다.

-진주별 미술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다.

△2014년 11월부터 운영해 이제 5년차가 됐다. 성인취미미술수업과, 초,중,고 미술수업을 하고 있다.

-왜 진주별이라 이름 지었나.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좋아한다. 거기에 고향 진주를 떠올리니 보석 진주가 생각났다. 빛나는 두 단어를 합쳐 ‘진주별’이라 지었다.

-교습소를 운영하게 된 계기는.

△부모님이 어릴 적 미술학원을 보내줬다. 그곳에서 하상우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내 미술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이젠 내가 하 선생님처럼 원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전하고 싶어 시작하게 됐다.

-나에게 있어 하상우 선생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하 선생님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의 자세나 마음가짐, 가치관 등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큰 도움을 주셨다. 지금도 꾸준히 선생님과 연락하며 지낸다. 선생님은 하대동에서 입시미술 학원을 운영중이시다. 하 선생님을 만난 모든 학생들은 나를 포함해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하 선생말고 또 다른 스승은.

△그림이다. 학원과 학교를 떠나고 나니 스승이 없었다.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땐 시키는 대로 하면 됐지만 이젠 내가 알아서 해야 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연구하며 부딪쳐 보니 자연스레 그림이 스승이 되었고 이로 인해 내가 발전하고 있었다.

-앞으로 계획은.

△5월1일부터 31일까지 사천 작은미술관(사천 문화재단)에서 작품을 전시한다. 이 전시가 끝나면 11월21일부터 25일까까지 대구 엑스코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를 준비해야 한다. 공모전에도 꾸준히 참여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그림이 집에 보관되지 않고 꾸준히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좋은 느낌,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 작품은 사람들에게 많이 공유될수록 가치있다.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작가로서의 활동이다.

조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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