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신뢰하는 기록물 ‘다이코기(大閣記)’ 유일하게 1차진주성전투 기록

김시민 장군은 3,800여 명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가 이끄는 2만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였다. 사진=박청기자
김시민 장군은 3,800여 명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가 이끄는 2만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였다. 사진=박청기자

조선건국 200여 년 동안 큰 전쟁 없이 평온하였던 시대에 임진왜란 전 당파싸움으로 인한 덕망 있는 지식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특히, 임진왜란 전 20년 동안 3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당파 색은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했었다. 그러한 시기 중국은 환관들의 정치로 정세가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내분을 잠재우기 위해 국외로 눈을 돌려 침략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당파의 치열한 갈등과 다툼에 의한 당리당략으로 통신사를 파견하는데 있어서도 서로 다른 판단으로 조선은 일본을 미개한 나라로 인정하며 방심을 하였다. 이에 히데요시는 1592년 4월14일 일본군 대병력으로 조선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조선은 한동안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치욕을 맞아야만 했다. 조선은 초기 몇 달간 전략적 요충지조차 포기하고 도망하기에 급급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 상황은 영호남의 전략적 요충지 진주도 마찬가지였다. 5월 초 목사 이경과 판관 김시민이 지리산으로 몸을 피하여 진주성은 지도자를 잃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5월8일 경상도 초유사로 내려오던 김성일은 함양에 도착하여 조종도와 이로의 도움으로 13일 산음에 이르러 이틀을 머물고 15일 진주에 도착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진주성의 방어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성일은 병사한 목사 이경을 대신하여 판관 김시민으로 하여금 진주성 방어체계를 갖추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남명학파 의병장들의 절대적 지원이 필요하였다. 의병군과 관군의 연대적인 방어활동으로 진주성 전투 이전의 진주성 방어에 큰 효과를 본 것이다.

충북 괴산군 충민사에 모셔져 있는 김시민 장군의 영정. 장군은 죽기 전까지 전란 중에 있는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국왕의 거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충성을 다했다.
충북 괴산군 충민사에 모셔져 있는 김시민 장군의 영정. 장군은 죽기 전까지 전란 중에 있는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국왕의 거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충성을 다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맹활약을 보여 승전의 대성과를 얻어낸 김시민은 조선 명종 9년(1554년)부터 선조 25년(1592년)까지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에 목천 출신이다. 자는 면오(勉吾)였던 김충갑의 아들로서 1578년 무과에 급제해 군기사(軍器寺)에 근무했다. 그 후 1591년 진주 판관으로 부임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했다. 그는 우선 지역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城民)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였다.

김시민은 군사의 행과 오를 편성,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특히 그는 당시 조정의 혼란스러운 당파와 전혀 이해관계가 없었으므로 정치적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했다. 다음 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임시 진주목사로 임명돼 6월과 7월 사천, 고성, 진해에 주둔 중이었던 왜군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김시민은 그 공로로 8월 진주목사가 되었다.

김시민 목사는 9월 적장 평소태까지 사로잡는 전공을 세워 다음 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를 제수 받았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3,800여 명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가 이끄는 2만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이었다. 김시민 장군은 전쟁 중 염초 및 총통 등을 제조해 활용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최경회 등이 적군 배후를 위협하는 도움을 받아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진주성 안에서 전체적인 지휘는 김시민 장군이 이끌었다. 10월5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맞아 적 세력을 진압한 후, 김시민 장군은 성안을 순회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을 이마에 맞아 부상을 당해 치료를 하였으나, 10월18일 3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제1차 진주성전투와 김시민 장군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대부분 기록은 일본 측이 승리한 제2차 진주성 전투에 관한 것들이다. 이는 역사의 객관성과 진실성에 배치되는 일본인 역사관의 현실이다. 그러나 1650년대 일본에서 신뢰받고 있는 ‘다이코기(大閣記)’ 문건에는 유일하게 제1차 진주성전투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영웅적인 활약으로 진주성을 지켜낸 목사 김시민(1554~1592)은 자신이 일본군에게 ’모코소(맹장 김시민 목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마지막 날 전투 중 탄환에 맞아 결국 전사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같은 기록이 일본역사에 있다는 것은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 당시 의병장 조경남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전하고 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이 졸(卒) 하다. 그가 총알에 맞은 뒤부터 그 몸을 생각하지 않고 더욱 나라만을 생각해 머리를 들고 때로는 북쪽을 향해 눈물을 흘렸는데 총알에 맞은 데가 낮지 않아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군중에서는 적이 알까 겁내어 숨기고 상(喪)을 발표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아 곡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고, 1년이 넘도록 남녀들이 소찬을 먹었다. 행상(行喪)이 함양에 이르자 조정에서 포창하여 우병사로 승진시킨 것이 알려졌다.’

이처럼 김시민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란 중에 있는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고 국왕의 거소가 있는 북쪽을 향해 충성을 다했다.

그가 사망하기 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망한 다음이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2등에 올랐고, 1709년(숙종 35)에는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영의정이 추증 되었다. 1607년(선조 40) 진주성에 사당을 짓고 창열사의 사액을 내려 김시민을 중심으로 전몰자 제신을 배향토록 하였다. 1711년에는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졌다. 최근엔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선무공신첩’을 국민의 성의를 모아 다시 사서 국내로 들여와 보관하고 있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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