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맹(靑盲)으로 조선왕조 출사를 거부하다

고려대사헌 우곡정선생 신도비. 거북 모양 비석 받침돌과 용을 새긴 비석 머릿돌이 비신과 더불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기(史記)’, ‘전단열전(田單列傳)’에 실려 있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직접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

최초 중국 제(齊)나라의 왕촉이 자기나라를 멸망시킨 연(燕) 나라의 신하로 살기를 거부하고 기탄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기록이 있다. 그 후 한국의 경우 조선건국에 동조하지 않고 조선왕조의 건국을 끝까지 부정하며 두문동으로 은거한 이른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과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세조 수양대군에 대해 처절한 죽음으로 대항한 사육신이 있었다.

‘두문동칠십이현’이나 ‘사육신’처럼 역대 보기 드문 충절충신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진주출신의 우곡(隅谷) 정온(鄭溫) 선생이다. 그의 거룩한 충절 혼이 남아있는 곳이 현재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에 있는 우곡정(隅谷亭)이다. 그러나 그의 애절한 충절행동에 비해 우곡정은 문화재 등급이 매우 낮은 도문화재자료 정도로 되어 있어 진주인으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곡정(隅谷亭)은 고려말 정온선생이 은거했던 곳이다.

정온선생은 고려말 1324년에 태어나 관직이 자헌대부(資憲大夫)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고려가 망하자 이른바 청맹(靑盲, 겉보기는 멀쩡하지만 점차 실명되는 눈병)을 핑계로 고향 진주로 낙향해 끝내 조선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던 진주 출신의 보기 드문 충절인이다. 그 후 1694년(숙종 20년) 진주의 정강서원에 배향되었으나, 고종(1868)때 서원철폐령으로 그 서원은 사라지고 없다. 정온선생은 진주정씨 우곡공파의 시조로서 고려시대 사헌부의 최고 관직을 담당했던 대사헌을 지냈다. 사헌부는 오늘날 감사원과 같은 일을 보는 곳으로 현실정무를 논평하고, 공직업무를 감사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 억울함을 풀어주고 외람되고 거짓된 것을 금하는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었으니 우곡선생이 대쪽 같은 성품을 방증해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정온선생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진주낙향

우곡정 지어 말년 은둔생활

정온 선생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해 진주로 낙향, 우곡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우곡은 정자 앞뜰에 못을 파고 주위에 백일홍 나무를 6그루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사진=박청기자
정온 선생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해 진주로 낙향, 우곡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우곡은 정자 앞뜰에 못을 파고 주위에 백일홍 나무를 6그루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사진=박청기자

이성계 부름 응하지 않고 우곡정서 말년 보내
정온 선생은 고려 말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두문동과 지리산 청학동에 은거 수양하다 진주로 낙향, 우곡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 우곡은 정자 앞뜰에 못을 파고 주위에 백일홍 나무를 6그루 심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은둔생활을 했다. 태조가 사위 이제(李齊)를 이곳까지 보내 초빙하였으나 차마 왕명을 거역치 못해 눈을 뜬 봉사가 되었다고 거짓 핑계로 사양했다. 이와 관련해 우곡정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성계가 우곡을 영입하기 위해 수차례 사람을 보냈으나 정온 선생은 이를 사양하다 급기야 눈뜬 봉사가 되었다고 핑계를 댄다. 이성계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제를 진주로 내려 보냈다. 이제가 내려와 우곡을 만나보니 우곡정 난간에 앉아 눈을 뜬 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이제가 청맹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솔잎으로 눈을 찔렀더니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선혈만 낭자했다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태조 이성계는 다시는 정온선생을 찾지 않았으며 정온선생은 말년에 이곳에서 조용하게 세상을 보낼 수 있었다 전한다.

1393년 건립, 1976년 중건된 우곡정
1393년(태조 2년) 건립된 우곡정은 1849년 중수하고 1976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며, 팔(八)자와 같이 날개를 편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어칸(御間)에 대칭이 있고 좌우에 방이 있는 평면이다. 전면 뒷마루에는 닭 모양 계자(鷄子)난간으로 둘러진 누(樓)마루 형식이지만 지면에서 그리 높지 않고, 아궁이는 배면(背面)에 있다. 대문 밖 앞뜰에는 낚시하던 못이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고, 오른편 우곡마을 뒷산엔 우곡선생의 묘소가 있다. 
우곡 정온선생의 대쪽 같은 충절정신은 후대 진주지역에 형성됐던 이른바 ‘진주정신(주체정신, 호의정신, 평등정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볼 수 있다. 진주는 예로부터 국지인재지부고(國之人材之府庫)라 하여 ‘나라에 인재를 공급하는 창고’로 불릴 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곳이며, 또한 “조정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진주에 있다”고 했을 정도로 인재가 많았다. 특히 충절·문화·예술·교육·사상가 등 후세 사람들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되는 분들이 많았다. 고로 진주는 충절의 고장 1번지답게 고려조의 문하시랑 하공진 선생,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 여진족을 두만강 너머로 몰아내고 함경도의 국경을 다진 양정공 하경복 장군, 동시에 단종을 보위하다가 순절한 우의정 정분, 계사년 진주성 싸움의 삼장사인 최경회와 황진, 그리고 김천일과 논개 같은 진주출신의 충절인들이 정온선생의 충절정신,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의 올곧은 정신은 오늘날 진주정신의 바탕으로서, 자유·평등·정의·주체정신 속에 학문과 문화예술을 숭상했고, 시대를 정확히 예감하는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기상을 형성했다. 그 기상이 이어져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질은 청맹으로 충절정신을 실천한 우곡 정온선생의 그토록 강인하고 거룩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정신으로 보다 강화되면서 오늘날 진주정신인 주체·호의·평등정신으로 승화됐다고 볼 수 있다. 

오늘도 우곡정에 가면 선생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연못과 선생이 직접 심은 백일홍나무들이 있고, 그것들은 마치 민족이나 국가, 더욱이 자기 고향에 대한 아무런 애착도 없이 그저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각성과 교훈을 주는 듯하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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