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백의총있는데 7만의총이 없다
관광장소로 전락한 계사순의단
제단 호칭 자체가 필요 없어

진주성 전경. 진주는 400여 년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세계 전사상 최다 선령들의 처참한 죽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자료사진.
진주성 전경. 진주는 400여 년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세계 전사상 최다 선령들의 처참한 죽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자료사진.

천년의 역사, 충절의 땅 그리고 전통과 예향으로 이어온 우리 진주인은 과연 외부에서 규정하는 진주의 객관적 캐릭터에 대해 긍지와 진정성, 존재감을 만끽할 수 있을까?

오늘날 진주인은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조상이 남겨준 장구한 역사, 충절 그리고 전통에 걸맞은 후속적인 노력도, 연구도 고민도 전혀 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선열들의 피맺힌 통곡 귀 기울이자

진주성, 남강, 촉석루의 역사적 흔적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단 한순간 즐거움과 행복보단 통한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선열들의 피맺힌 통곡이다. 참혹한 원망의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1592년 4월 부산 동래에서 수백 명 군관민이 순절했고, 같은해 8월 충청도 금산에서 칠백 여명 의병이 순절했다. 진주에서도 1593년 계사년 6월 칠만 여명 진주 선열들이 단 한 명 흔적도 없이 진홍빛으로 까맣게 순절했다. 당시 동래, 금산, 남원에서는 지역민들이 즉각 그 많은 시신들을 거두고 안치하고 합장(合葬)하여 참담한 원혼들의 명복을 빌 수 있는 의총을 만들었다. 그러나 진주는 400여 년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도 세계 전사상 최다 선령들의 처참한 죽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진주도 의총 건립 필요해

의총(義冢)이란 “의로운 일로 돌아가신 많은 분들을 함께 모시는 무덤”이라는 뜻이다. 보다 정확한 의미는 “아무런 연고자 없이 돌아가신 다수인들의 무덤을 신분 고하를 막론 국가기관에서 좋은 자리에, 그것도 많은 경비를 들여 조성한 무덤”이다. ‘맹자(孟子)’의 양혜왕(梁惠王) 편에 이르길 “국가는 모든 백성들의 양생(養生: 건강하고 오래 산다)과 상사(喪死: 장사를 잘 지내준다)를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건립되었고 현재까지도 엄청난 국가재정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각 지역 의총들에 비해 가장 많은 선열들이 가장 비참하게 죽은 우리 진주에는 의총은커녕 그 건립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작금 진주시의 일부 지각 있는 문화단체에서 의총건립을 위한 의지와 운동을 전개하고 있고, 타지에서도 의총건립 의지에 동참해주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성과나 인식 변화는 없는 실정이다.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문제 많다

11가지 계사순의단 모순과 문제점들

1987년 12월 진주성 촉석광장 서쪽에 건립된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억울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을 모시는 무덤, 제각, 제당은 관광 장소가 아닌 충절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소로 사용해야 한다. 사진=박청기자
1987년 12월 진주성 촉석광장 서쪽에 건립된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억울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을 모시는 무덤, 제각, 제당은 관광 장소가 아닌 충절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소로 사용해야 한다. 사진=박청기자

1987년 12월 진주성 내 촉석광장 서쪽에 건립된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이라는 제단은 숭고한 선열들의 충정에 대한 진주인들의 존경과 흠모의 표지이자 동시에 진주와 진주인 정신의 지주로서 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 해당 순의단에 대한 부적절한 설립과정과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많은 이들의 지적과 논란이 있어 문제다. 타 지역 관련 제단과 각종 사서 및 예서(禮書)에 기록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열 한가지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의 모순과 부적절한 부분을 논해본다.

▲우선 이중제단 설치에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전쟁의 큰 승리로 타계한 영령과 한으로 타계한 영령을 같은 장소에 모시게 되면 후손들이 제사를 아무리 정성스럽게 모셔도 영령 신들이 결코 강신(降神)하지 않는다. ▲다수 민간인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제단이나 무덤에는 특별한 호칭이나 명명이 결코 필요 없다. ▲제단이 일단 설치되면 그 제단의 서북쪽에 무덤(塚)이 반드시 설치되어야 한다. ▲그 무덤의 설치는 가능한 개인의 집과 무덤을 만들 때처럼 필히 풍수지리에 적합한 명당에 모셔야 한다. ▲많은 이들을 하나의 무덤에 모시지만 그 무덤 주변은 광활한 면적의 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실제 모든 이에게 개인별로 모실 수 있는 부지가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단 자체에는 특히 억울하게 죽은 다수 영령들에 관한 당시 인적사항이나 그 내력에 관해 결코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다. 특히 당시 기록된 원문을 번역하거나 더욱이 외국어로 표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 내력이나 인적사항은 주변 신도비나 안내비에 따로 기록해두어야 한다.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제단은 축대와 높게 설치하면 결코 안 된다. 제사는 아주 낮은 곳에서 낮은 자세로 모시는 것이다. ▲모든 제단은 바람과 비를 맞는 야외에 결코 설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타계한 영령들은 저승에서도 보다 안락한 집에 모셔야 하기 때문에 모든 제단은 반드시 지붕이 있는 구조물 안에 설치해야 한다. ▲억울하게 죽은 많은 영령들의 제단이나 무덤은 바로 그 자리에 설치하거나 제사를 모셔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훗날 그곳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면 선대 영령들이 결코 강신(降神)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이라는 제단 명은 결코 문장이나 문자적 합리성 면에서 성립될 수 없다. 특히 ‘순의(殉義)’라는 단어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억울하게 타계한 많은 사람들을 모시는 무덤, 제각, 제당은 결코 후대들에게 관광을 위한 장소로 쓰여서는 안되며, 오직 선열들에 대한 충절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소로 사용해야 한다.

이처럼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촉석광장에 마치 관광을 위한 문화재처럼 설치해놓은 임진대첩 계사순의단은 분명 적지 않은 모순과 오류를 가진 곳이라 하겠다.

의총은 진주향토사 연구의 정수이자 목표

계사년 6월, 하늘과 땅이 죽음처럼 무너진 그날 초록의 평화로 살아온 진주진양이라는 땅이 느닷없이 이웃 살인마의 잔학한 탐욕과 추악한 살육으로 지구상에서 영원히 묻혀질 뻔 했다. 사람은 물론 하늘을 나는 새, 땅속 벌레들까지 흔적도 없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지구 역사상 그 선례를 거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완벽한 초토가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명분이나 사유도 없이 진주는 그 한들을 달래기 위한 의총건립을 하지 않고 있다. 1592년 부산 동래, 1593년 충남 금산, 1597년 전북 남원에서 순절한 사람들의 후손은 의총을 즉각 건립했다. 하지만 이곳 진주는 1593년 당시 7만 여명 선열들이 참혹하게 순절했음에도 420여 년간 의총 건립은커녕 그 중요성조차 제대로 모른 채 산다. 심지어 비참하게 순절한 선열들의 흔적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저 통탄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부 지각 있는 몇 분이 의총건립 의지를 모아 7만 의총건립의 당위성과 진주의 역사를 정립하고자 동분서주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필자도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으로 참여하며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논개 및 삼장사에 관한 역사적 이론체계를 세우는 과정에서 의총의 의미, 의총의 중요성, 의총건립의 당위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의총 연구는 현 진주 향토사 연구의 정수이자 목표, 나아가 화급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 건립의 당위성을 공유하고 진주시민 모두가 의총건립의 역사적 사명감을 철저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강신웅 본지 진주역사문화찾기 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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