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로드카페로 시작...현 46호점 오픈
커피자료모아 진주에 커피박물관 짓고파

650평 전국 최고규모 커피마켓 ‘고고커피’

판넬창고서 시작해 5년 만에 부산입성
본사 인원 300명…모든 직원이 정직원

윤기남 대표는 24살 때 경상대 앞에서 로드카페를 시작했다. 더웨이닝의 시작이다. 그리고 지금은 46개 매장과 1,000곳이 넘는 거래처를 확보한 명실공히 중견 CEO가 되었다
윤기남 대표는 24살 때 경상대 앞에서 로드카페를 시작했다. 더웨이닝의 시작이다. 그리고 지금은 46개 매장과 1,000곳이 넘는 거래처를 확보한 명실공히 중견 CEO가 되었다

진주를 넘어 전국을 넘보는 더 웨이닝 커피(The Wain-ing Coffee)는 2005년 ‘Take Out with Coffee’라는 로드 카페로 시작했다. 윤기남 대표(36)가 옛 사람들의 길잡이였던 북두칠성(WAIN)처럼 커피의 길잡이가 되리라는 바람으로 만든 브랜드다. 브랜드명은 카페 이용객들을 대상으로 한 공모에서 택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카페이기에 이 공간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고 윤대표는 말한다.

윤대표는 과거 노점 장사가 너무 부끄러웠다. 어렸을 때 추리닝 입고 동네 슈퍼에도 잘 안 갔을 정도로 그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 장사를 위해 차를 끌고 가서도 두 시간씩 차 안에 그냥 앉아 있곤 했다. 하지만 그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군대에서 100권이 넘는 책을 읽으며 준비해 각종 자격증을 섭렵한 요리를 미루고 커피를 택한 일도 커피 산업에 대한 긍정, 커피를 향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웨이닝은 현재 46개 매장을 갖고 있다. ‘다 같이 잘 살자’는 창업 모토에 맞게 모든 직원이 정직원이다. 본사 직원은 간접 인원까지 합치면 300명에 이른다. 윤대표의 꿈은 더웨이닝을 한국 최고 커피 브랜드로 만드는 것, 그리고 자신의 고향 진주에 커피박물관을 짓는 일이다. 더웨이닝 본사는 현재 진주에 있다. 윤대표는 앞으로도 본사를 옮길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외동아들 “어머니에겐 나 밖에 없었다”

-외동아들로 안다. 어린 시절 윤기남은 어떤 아이였나.

△청개구리 성격이다. 또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지기 싫어했다.

-학교는 어딜 나왔나.

△진주 천전초등학교와 진주남중을 나왔다. 당시 집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학업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단성고등학교를 나왔다. 3학년 실습 때 선생님과 상담했는데 기술이 있어야 작은 가게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요리를 배우면 뭐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커피가 아니라 요리였나.

△그게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도 요리 전공 학과로 들어가기로 마음 먹었다. 마산대학 호텔요리를 전공했는데 졸업할 무렵 모 드라마 때문에 파티셰가 한창 유행했다.

-힘든 얘기겠지만 20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20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엄청 힘들었지만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는 일을 조금 빨리 겪었다 생각했다. 힘들지만 평생 고생만 하시면서 살아오신 어머니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겐 나 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2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들었다.

△논산 병원부대 장교 식당에서 취사병으로 근무했는데 주로 환자들 배식을 담당했다. 과일도 돌려 깎기 해가면서.(웃음) 당시엔 오전4시부터 밤10시까지 TV도 안 보고 요리 책, 역사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제대 후 한식, 일식, 양식, 제과제빵 관련 자격증을 모두 땄다.

-하지만 요리사 쪽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 교수님이 서울 유명 호텔 쉐프 밑에서 배우라고 하셨다. 하지만 요리 기술을 배우려면 한사람 밑에서 5년, 10년은 있어야 했다. 어렸을 때 꿈이 사업이었기 때문에 결국 트럭을 장만한거다.

-특히 기억에 남는 책이 있나.

△야마오카소하치의 ‘대망’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에모토 마사루라는 사람이 쓴 ‘물은 답을알고 있다’도 인상 깊게 읽었는데, 사진이 많아 30분 만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권장하는 더웨이닝 직원들의 필독서이기도 하다. 가령 책 내용 중에 ‘좋은 말을 해주면 물의 결정체도 좋아진다’는 게 있는데, 사람도 70퍼센트 이상이 물이니 우리 내면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했다.

◇노점 장사가 상권 파악 눈 앞당겨줘

-경상대 인근에서 노점 장사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24살 때 로드카페를 시작했다. 경상대 앞 기존 아주머니께서 하던 노점을 인수해 3년을 장사 했다. 그때 안 팔아본 게 없다. 1미터 80센티미터 길이 판 위에 홍합, 오뎅, 생과일주스, 햄버거, 꼬지, 떡볶이 등을 놓고 팔았다. 세월이 지나 당시 중학생 단골 친구가 대학 가는 것도 봤다. 벌써 10년도 훨씬 지난 얘기다.

-여러 곳을 옮겨가며 팔았다고.

△경상대, 보건대, 산업대를 돌았다. 새벽 과일 장만해서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경상대에서 장사했는데 당시(2005년)만 해도커피숍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매출이 괜찮았다. 하지만 인근 커피숍 사장님들이 신고를 많이 했다. 반칙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들은 안쪽에서 장사하는데 나는 길목에서 하니까 부당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사장님은 깨끗한 가게에서 하시고 저는 펌프 돌려가며 장사하지 않습니까’ 정중하게 따지기도 했다.

-점심과 저녁 때는.

△점심 때는 보건대와 진양호(수자원공사) 쪽으로 갔다. 보건대 학생들은 부러 오르막길을 내려와 사 마실 정도였고, 경해여고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는 산업대(현 과기대) 정문에서 장사 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무조건 장사가 잘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장사에 눈을 뜬 기분이었겠다.

△맞다. 길에서 장사를 하다 보니 상권에 대한 눈을 빨리 떴다. 단순히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닌, 내가 파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포인트였다.

-노점 장사 다음엔 무엇을 했나.

△대구의 S커피숍 브랜드 대표님과 친분이 있어 경상대 후문에서 지점을 운영하려 했다. 당시만 해도 커피 전문점들이 활성화 되기 전이어서 스타벅스 같은 전문점이 좋으냐, 개인 커피숍이 좋으냐를 따지던 때였다. 2007년이었는데 나는 전문점 쪽으로 마음이 더 갔다. 그래서 레시피는 내가다 마련 할 테니까 브랜드만 가져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는데 80% 진행되고 가게에 불이 났다. 주위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오히려 담담했다. 불 난 집이 장사가 더 잘 된다고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을 한 거다.

-S브랜드 지점은 얼마나 운영한 건가.

△1년 넘게 했다. 당시 영업이 엄청 잘 됐다. 경상대 재학 아르바이트 생들이 하나 둘 직원이 되기 시작했다.

부산 금정구 부곡동 중앙대로 변에 위치한 커피백화점 ‘고고커피’ 건물 외관. 건평 650평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지하1층은 물류시설로, 지상 1층은 카페와 커피 용품 매장, 2층은 바리스타 아카데미, 3층과 4층은 사무실로 쓰고 있다. 2015년 11월 준공됐다
부산 금정구 부곡동 중앙대로 변에 위치한 커피백화점 ‘고고커피’ 건물 외관. 건평 650평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지하1층은 물류시설로, 지상 1층은 카페와 커피 용품 매장, 2층은 바리스타 아카데미, 3층과 4층은 사무실로 쓰고 있다. 2015년 11월 준공됐다

◇커피 산업 포화? 아직 2,3배 성장 가능성 있어

-그러다 더웨이닝을 구상한 건가.

△그렇다. 이름을 공모했고 경상대 앞에 가게 자리도 얻었다. 물론 처음엔 주위에서 반대도 많았다. 1호점 공사 때 ‘공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공사를 새로 하냐’는 말도 있었고 ‘와인과 커피를 파는 거냐. 이름이 촌스럽다’는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 진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진주에 있는 45평 가게지만 진정성만 있다면 5년, 10년, 30년 뒤엔 누구나 아는 브랜드가 될 거라고 봤다. 이건 스타벅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하나 밖에 없지만 오래 하면 다른 위치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

-사업 초기 분명 힘든 점이 있었을 것 같다.

△노점 장사는 증빙자료가 없어 은행들이 인정을 안 해줬다. 청년 창업 혜택을 문의하러 은행들을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퇴짜였다. 매장이 하나 둘 생겨가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사업은 기본적으로 투자가 필요한데 자본력 없이 시작했다 보니 늘 마이너스 통장이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 아직도 마이너스 통장이다(웃음).

-커피 사업을 시작했을 때 국내 시장과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가.

△2000년대 초중반 당시에는 진주에 커피숍이 많이 없었다. 즐기는 인구도 적었다. 그렇다고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건 아니다. 사람들이 이제 커피 산업이 포화상태라서 힘들다고 하는데 커피업 하는 사람들과 얘길 해보면 아직 2, 3배는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선진국이 될 수록 커피 시장에선 원두 커피 비율이 올라간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근 몇 년 사이 부산 진출이 눈에 띈다.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부산은 기존 커피 산업체가 탄탄하게 포진하고 있는 곳이다. 유통, 도매, 재료, 기계 등 관련 업체만 100개가 넘는다. 시장 진입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커피 제품을 가지고 가면 그들은 반칙으로 여긴다. 그래서 조금 우회해서 동김해IC앞 60평 떡공장 창고를 얻어 직원들과 합숙을 했다.

-제법 규모가 있는 부산 사옥을 오픈 했다.

△사무실 연지 5년 됐다. 금정구 쪽 시장 내 판넬 창고에서 시작했다. 히터 없고 에어콘도 없이 3, 4년을 보냈다. 그 안에서 이사를 5번 넘게 다니다 2014년에 조건이 맞는 부지를 매입했다.

진주제일병원 특강 모습. 그는 강의하는 일을 “익숙한 것에 관한 거라 즉석에서 두 세시간 얘기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진주제일병원 특강 모습. 그는 강의하는 일을 “익숙한 것에 관한 거라 즉석에서 두 세시간 얘기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외주 없이 모든 것 자체 해결

-벤치마킹 한 곳이 있나?

△딱히 없다. 대신 손님들이 뭘 원하는지 늘 고민 했다. 핸드메이드 메뉴, 과일 아이스크림 등. 더웨이닝은 유일하게 외주가 없는 회사다. 본사에서 모든 식자재가 공급되고 커피와 관련된 1차 산업을 직접 관장한다. 저희가 납품하고 관리하는 부산, 경남 쪽 거래처만 1000 여 군데다. 인테리어도 직접 시공하고 메뉴도 자체 공급 식자재로 매장에서 직접 만든다. 손님들이 ‘이 가게는 정성스럽게 만든다’ ‘이 가게의 소스와 시럽은 남다르다’ 느끼는 것이 바로 다른 브랜드와 더웨이닝의 차이다. 나는 아직도 원가 계산을 잘 못 하는데 오늘 하루만 장사할 게 아니라 늘 멀리 보기 때문에 비용보다는 질에 주력한다. 신경과 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외주 없이 모든 걸 자체로 해결한다는 게 인상적이다.

△처음엔 외주로 맡겼는데 원하는 부분이 안 나왔다. 건축도 마찬가지여서 인테리어도 직접 하게 된 거다. 부산 650평 건물 전층을 쓰는 물류 유통업도 ‘고고커피’라는 전국 최대 커피 전문 마켓이 있어 가능했다.

대기업들이 장악하다시피 한 커피 프렌차이즈 업계 어느 부분에서 승산 있다고 판단했나?

△5, 6년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시장이 변했기 때문에 대기업들도 힘든 구조로 가고 있다. 커피에는 결국 자본보다 감성이 필요하다. 감성 커피 브랜드. 감성은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도태될 것이라 생각한다. 더 준비하고 손님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줄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한다. 물론 최종 선택은 고객의 몫이다.

-진주에서 왜 커피를 시작했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진주 사람들이 애향심이 많다. 나도 마찬가지다. 더웨이닝 코리아 법인 주소가 진주로 되어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나는 진주를 떠나 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내 고향이고 너무 좋은 곳이다.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란 게 불편할 때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몸에 배여 그런지 큰 문제는 아니다. 진주에는 분명 진주만의 매력이 많다.

-일벌레라는 소문이 들린다.

△S커피숍을 할 때 15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일했다. 더웨이닝 사업 초기에도 가게 마치면 운전해서 서울 올라가 사우나 들렀다 아침 일을 보는 생활을 했다. 물류 관련 일은 진주에서 해결을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도 쉬는 시간은 적다. 주위에선 쉬어라고들 하는데 회사가 사실 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계획은 계획일 뿐, 중요한 건 행동

-본인이 가진 어떤 것이 일의 추동력이 되는가.

△살면서 사업계획서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계획서는 말 그대로 ‘계획’일 뿐이다. 실제 주위에 계획만 세우다 행동으로 못 옮기는 경우를 많이 봤다. 중요한 건 행동이다. 나는 생각하면서 동시에 행동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친구 중에도 잘 사는 집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열심히 살 이유가 없다. 하지만 나는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여유 있는 사람에겐 체인점을 안 내준다고.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제일 열악한 자리에서 최고 매출을 올리는 비결은 다름 아닌 사장님들의 커피에 대한 열정이다. 창업 문의를 하러 오시는 분들께도 ‘커피를 좋아해서 하루 몇 잔 못 팔아도 해야 한다’고 말씀 드린다. 사업은 사람들을 물건처럼 배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타보다는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 내가 진정성과 열정을 강조하는 이유다.

-본사 조직은 어떻게 꾸려지고 있나.

△총 직원수가 70, 80명 정도 된다. 간접 인원까지 하면 200~300명 되겠다.우리 회사는 파트타이머는 없다. 오래 멀리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정직원으로 채용한다. 나는 짧게 장사를 하고 싶지 않다. ‘다 같이 잘 살자’가 창업 초 모토이기도 했고. 지금도 전 직원이 창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고 바람이다. 회사가 다 갖추고 있으니까, 정말 안정 돼서 직원들이 누구나 다 자신의 매장을 갖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언제가 고비였고 언제가 터닝포인트였나.

△혼자 할 땐 괜찮았는데 관계 형성이 많이 되면서 사람이 가장 힘들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그런 경우 있잖나. 그런데 경험을 하면서도 성격상 사람을 잘 못 내친다. 믿으면 믿는다. 터닝포인트는 매 순간 일어나는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일 하려고 한다. 그 친구들보다 열심히 해야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놀면서 열심히 해라 말을 못 한다. 사장이 되고 싶으면 사장처럼 일 하라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남들과 달라야 된다. 남들 놀 때 놀면서 성공을 바라는 건 욕심이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나.

△어머님이 많이 존경스럽다. 어릴 때 망경동에 살았는데 단칸방 이사를 여러번 다녔다. 어머니는 공장에 다니셨고 아버지는 트럭 운전을 하셨다. 내가 고집도 세고 청개구리처럼 말을 안 들었는데도 어머니는 나를 홀로 키워내셨다. 남들에게 고집 센 아들, 청개구리 아들 소리 듣지 않으시려 더 열심히 키우셨다.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웨이닝의 원칙이 있다면.

△원칙은 깨질 수 밖에 없다. 상황은 바뀌니까. 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을 늘 고민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음식은 원재료가 좋아야 맛있다’는 것도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한국 1등..20년 뒤면 가능하지 않을까

-현재 46호점까지 오픈했다. 딱히 광고 없이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매장이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곳에 오픈 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커피도 음식이라 광고보다는 입으로 전해진다. TV 광고는 우리에게 필요없다. 맛있다는 입소문이면 된다.

-중국 광저우 진출은 어떻게 돼 가나.

△컨설팅 교육 하러 많이 갔었다. 쉽지 않았다. 우리 자본과 그 쪽 자본이 동등하게 할 수 있는 회사가 나왔을 때 가능할 일인데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무엇이 힘들었나.

△중국인의 여유로운 마음과 한국인의 급한 마음. 급한 쪽이 진다(웃음). 중국인은 엄청 느긋하다. 한국 사람이 비즈니스에서 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3시간씩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그러다 중요한 비즈니스 얘기 한 마디 섞고, 그런 식이다. 중국에 꽤 많이 왔다갔다 하면서 각 성들 다 다녀보고 했지만 그쪽에선 한국에서 내실이 정확한 업체만 상대한다는 걸 알았다. 좀 더 멀리 보고 있다.

-중국 다음은 어디인가.

△아직은 없다. 사옥 지은 지 오래 안 돼서 일단 회사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할 생각이다.

-사업은 물론 대학 특강, 각종 커피 관련 대회 심사위원, 심지어 라디오 진행도 하던데 힘들진 않나.

△다 쉽진 않지만 힘든 건 아니다. 나는 일 하는 게 제일 좋다. 익숙한 일에 관한 것들이라 즉석에서 두 세시간 얘기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왔고 느낀 것들을 꾸밈없이 말 하면 되니까.

-한국 커피 업계 1등, 한국에서 가장 큰 커피 회사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했다. 얼마나 남은 것 같나.

△내 꿈 이전에 회사의 꿈이다. 아직 한참 많이 남은 것 같다. 20년 뒤면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하고 있다.

-향후 계획과 목표, 그리고 더웨이닝 매장 및 카페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생각을 잘 하셔야 한다. 좋아하면 하시고 아이템, 돈벌이 수단으로는 이 업이 정말 별로라고 말해드리고 싶다. 식당은 맛있으면 욕을 하면서도 가지만 커피숍은 그렇지 않다. 음악과 조도와 온도 등을 지적한 사람들은 다시 오지 않을 확률이 높다. 커피숍 운영을 위해선 열정과 관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 꿈은 세계일주 하는 것, 그리고 커피 관련 자료들을 모아 진주에 커피 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김성대 기자 사진제공=윤기남

관련기사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