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히말라야 루트 ‘코리안 하이웨이’ 개척
최다 인원으로 K2 등정 해 기네스북에도 올라

히말라야산맥 2400km 패러글라이딩 횡단 ‘이카로스의 꿈’

KBS글로벌대기획 3부작 다큐멘터리 출연
제3의 삶으로 “마지막 목표는 지구 탐험”

히말라야 로부제 정상에서. 박정헌 대장은 24살 때 한국에서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등정했다. 이듬해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세계 최초로 등정했고 26살 땐 시샤팡마, 초오유, 알프스를 올랐다.
히말라야 로부제 정상에서. 박정헌 대장은 24살 때 한국에서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등정했다. 이듬해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세계 최초로 등정했고 26살 땐 시샤팡마, 초오유, 알프스를 올랐다.

현재 진주 충무공동 종합운동장 내에서 ‘예티 클라이밍 짐’을 운영하고 있는 박정헌 대장은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산악인이다. 구 삼천포 남양에서 나고 자란 박 대장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산을 타기 시작했다. 당시엔 농사일로부터 탈출 수단으로 산을 탔지만 고등학교는 바로 그 산을 위해 부산선원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마도로스와 클라이머를 저울질 하던 10대 청년은 결국 히말라야 행을 택했고 산은 끝내 그의 운명이 되었다.

24살 되던 해인 94년, 경남 안나푸르나 원정대에 선발 된 박 대장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했다. 이듬해엔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26살 땐 시샤팡마와 초오유, 알프스를 내리 올랐다. 또 97년엔 낭가파르밧에 가 솔로등반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시도했다. 그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2005년 1월, 그의 클라이밍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촐라체봉 하산길에 당한 조난 사고다. 함께 갔던 후배 최강식이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두 사람은 죽을 고비를 맞았다. 최강식은 두 다리가 부러졌고 박 대장은 갈비뼈 두 개가 나갔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복귀 후 둘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게 된다. 박 대장은 8개 손가락과 발가락 2개를, 최강식은 19개 손발가락을 잃었다.

하지만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박 대장은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조난을 당하고 6년 뒤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박정헌 대장은 생애 소원 중 하나였던 무동력 패러글라이딩 2400km 히말라야 횡단을 보란 듯 성공해낸다. 이는 KBS 창사특집 3부작 다큐멘터리로 TV에 따로 방영되기도 했다. 그는 이후에도 2년 주기로 히말라야를 찾았다. 

아웃도어로 할 수 있는 웬만한 건 다 해보고 싶다는 그의 향후 계획은 갤러리 오픈과 지구 탐험이다. 과거 진주 칠암동에서 한 차례 문을 열었던 ‘세계문화유산’ 수준의 갤러리를 그는 되도록 제2의 고향인 진주에서 다시 열고 싶어 한다. 지구 탐험은 그의 평생소원이자 목표로, 3년의 원정길에 오른 뒤엔 운영하던 예티 클라이밍 짐을 진주시에 기부하거나 후배들에게 맡기려 생각하고 있다. 박 대장의 도전은 아직 진행형이다.

중학교 2학년 ‘지리산 등산학교’ 때 모습. 사천이 레저의 메카라고 말하는 박 대장은 중학교 시절, 무료한 농사일로부터 탈출 수단으로서 등산을 시작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지리산 등산학교’ 때 모습. 사천이 레저의 메카라고 말하는 박 대장은 중학교 시절, 무료한 농사일로부터 탈출 수단으로서 등산을 시작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등반 시작

-사천 출신으로 알고 있다.

삼천포다. 지금은 사천이 됐지만. 노을로 유명한 실안 가기 전 과수원 많은 남양이라는 동네가 있다. 거기가 고향이다. 어떻게 보면 와룡산 밑이고 각산 밑인 동네다.

-집에서 어업을 했나.

그렇다. 어업도 있고 과수원도 했었고. 지금은 형이 가업을 물려받아 과수원을 하고 있다.

-가족은 계속 고향에서 살고 있는 건가.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큰형이 농사를 짓고 있고 작은 형도 사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는 97년도에 진주에 왔다.

-3형제인가.

좀 많다. 3남3녀. 내가 막내다. 아버지께서 88세 때 돌아가셨으니. 

-흩어져 살겠다.

맞다. 둘째 누나는 돌아가셨고 큰 누나는 울산, 작은 누나는 산청에 살고 있다.

-학교도 남양에서 나온 건가.

남양에서 다 나왔다. 남양초등학교, 남양중학교.

-생활이 좀 어땠나.

농부의 아들로서 농사 짓는 게 일이었다(웃음). 당시엔 다 그랬다. 농사가 많은 집안 애들은. 배나무, 감나무, 복숭아나무를 전정하고 나면 이제 우리가 가지를 줍는 거다.

-등산을 시작한 건 언제였나.

중학교 2학년 때다. 그땐 등산이 그냥 일상으로부터 탈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분한 농사일로부터의 탈출. 사실 사천이 레저에 있어 천혜의 도시다. 상사바위라는, 서부경남에서 가장 큰 암벽장이 있어 암벽등반 하기에 좋고, 용두산은 패러글라이딩의 메카다. 송포만엔 윈드서핑과 요트가 있고.

-예비 산악인에겐 그야말로 천혜의 환경이었겠다(웃음).

맞다. 그런 필드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양한 것을 빨리 익힐 수 있었다. 사실 패러글라이딩이나 스키는 별개 스포츠가 아니라 등산의 한 분야다. 우린 산이 작으니까 걸어서만 가는데 그쪽 사람들은 만년설 속에 사니까. 그래서 그런 액티비티들을 등산에 포함된 행위로 친다. 그들이 마운틴 스키, 마운틴 패러글라이딩, 마운틴 바이크라 부르는 이유다.

-중학교 2학년 때 삼천포산악회에 가입을 했다.

그땐 회원도 아니었다. 준회원이었지. 학생은 회원 자격이 없었다.

-등반을 하기엔 다소 어린 나이다. 어른들과 함께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상사바위 암벽 등반부터 시작했다. 그냥 집으로부터 탈출 수단이었다. 그때만 해도 상사바위가 암벽 등반 하기엔 최적지였다. 지금이야 클라이밍 짐처럼 패턴의 변화와 더불어 실내 스포츠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 이런 것들은 꿈도 못 꿨다. 중학교 땐 상사바위에서 주로 암벽을 탔고 방학 땐 서울 인수봉으로, 설악으로 다녔다.

-고등학교 진학은 다른 지역으로 했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는 부산 금정산에 있는 부채바위가 가장 핫 했다. 그래서 부산선원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등산을 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그냥 산 그 자체에 매료됐던 거다. 89년도에 처음 등정한 히말라야를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땐 산에 빠져 살았겠다.

맞다. 그땐 뭐 학교보단 산이었다(웃음). 산을 위해 부산으로 간 거니까.

-혼자 다녔나.

부산엔 산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계공고에도 산악부가 있었을 정도다. 그 시대엔 그 친구들이 산악계를 주름 잡았다.

-그들 중 이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나.

물론이다. 지금 대한민국 클라이밍 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그 친구들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본래 한국 클라이밍의 일번지는 부산, 경남이었다. 그러다가 서울로 가서 전국으로 확산됐을 뿐이다. 옛날 사람들은 아마 기억하고 있을 거다.  

-원래 마도로스가 꿈이었다고?

낚시도 바다도 정말 좋아했다. 부산선원고등학교에 가면서 그런 산과 바다라는 공동의 목적을 창출할 수 있었다(웃음). 거기서 자격증 따서 실습까지 나갔는데, 밴쿠버로 가는 화학물 전용선을 탔다. 그런데 누가 히말라야 간다고 해서 내렸다(웃음).  

-역시 바다보단 산이.

바다도 재밌다. 요트를 배우고 카약으로 제주도 일주를 한 건 그래서다. 나는 아웃도어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다. 공부는 안 하고 어릴 때부터 익힌 게 그런 것들뿐이니(웃음). 어찌 보면 내가 나고 자란 삼천포라는 곳이 바다와 산의 경계이지 않은가. 바다는 수평, 산은 수직. 둘 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

경남진주신문과 인터뷰 중인 박정헌 대장. 그는 2005년 1월 ‘히말라야의 난공불락’으로 일컫는 촐라체봉 등정 후 하산 과정에서 사고로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경남진주신문과 인터뷰 중인 박정헌 대장. 그는 2005년 1월 ‘히말라야의 난공불락’으로 일컫는 촐라체봉 등정 후 하산 과정에서 사고로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 25살 때 에베레스트 등정, 훈장만 3개 받아

-본격적으로 히말라야를 등정하기 시작한 것이 언젠가.

94년 경남에서 안나푸르나 원정대가 있었는데 거기에 선발이 돼 한국에선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봉우리를 등정했다. 당시 내 나이 24살이었다. 이듬해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세계 최초로 등정했고 26살 땐 시샤팡마, 초오유, 알프스를 올랐다. 97년엔 낭가파르밧엘 가서 솔로 등반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시도했다.

-안나푸르나 등정을 ‘절반의 성공’이라고 했다.

당시 셰르파(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네팔 현지인)가 3명 있었는데, 그 세 사람과 내가 같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길을 다 만들어줬다. 산은 자기 스스로 가야하는 건데 말이다. 그 일로 깨달은 바가 있어 에베레스트에 갈 때까지 이후 1년 동안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에선 내가 셰르파들을 데리고 산을 올랐다.

-1년의 준비라는 건 어떤 뜻인가.

원정을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카로스의 꿈’만 해도 2년을 준비한 거다. 89년, 94년 히말라야 원정 역시 2년 정도씩 준비한 것이고. 히말라야 가기 전엔 매주 산에 오르는 훈련을 한다. 94년엔 창원 공설운동장 앞 숙소에서 6개월 동안 합숙 훈련도 했다.    

-그런데 20대 때 저런 기록들을 세웠는데 나라에선 어떤 관심도 없었나?

내가 받은 훈장만 세 갠데 사실 훈장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다. 선배들 말씀이 ‘산은 무상의 행위다’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훈장을 받아도 상금이 안 나온다(웃음). 이건 우스갯소린데 훈장을 보면 국가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말이 적혀있다. 따지고 보면 진주에선 내가 국가 발전에 제일 이바지를 많이 한 거다(웃음). 진주엔 훈장 세 개 이상 받은 사람이 나 말곤 없기 때문에.

-이쯤 되면 지역이 야속할 만도 하다.

아마 내가 서울 사람이었다면 8000미터 14개봉을 다 올랐을 거다. 시대로 따져봤을 땐 엄홍길 대장보다 어쩌면 내가 일찍 올랐을 수도 있다. 엄홍길 형은 5살 때 서울로 갔다. 하지만 지방에선 경제적으로 빈약할 수밖에 없다. 지방에선 원정을 위한 돈 몇 천 만원 후원받기가 쉽지 않다. 그 시대를 생각해보면 한 번 원정 갈 때마다 최소 5천만원에서 1억5천만원이 드는데 진주에서 누가 그걸 후원해주겠나.

-돈은 역시 현실이다.

그래서 에베레스트 갔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 이대로 서울에 정착할까 하고. 주위에서도 많이 권유했고. 하지만 나는 등로주의라는 내 노선이 확실했기 때문에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굳이 그렇게 높은 산들이 아니더라도, 낮아도 어려운 산이 많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에. 산에 다녀선 승산이 없어서 97년도에 생계를 위해 진주로 왔다. 

-‘등로주의’란 어떤 것인가.

원정을 가면 에베레스트 같은 경우 기본적으로 두 달 정도가 걸린다. 원정이 시작되는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 정상까지 오르는데 한 달 정도 시간을 가지는데, 매일 짐 올리고 로프를 설치한다. 에베레스트에선 3천미터 정도 로프와 3톤 정도 물량이 필요하다. 봄이 되면 약 3천명의 사람들이 에베레스트에 머무는데 수많은 야크들이 짐을 나른다. 보고 있으면 시장통이 따로 없다. 그런데 그 많은 것들을 다 버리고 온다. 이것이 일반적인 등반이다. 하지만 등로주의는 다르다. 가장 적은 돈과 가장 적은 장비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오르고, 자연과 인간이 만나서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돌아오는 것. 이것이 바로 등반의 꽃, 등로주의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등로주의라는 걸 잘 모른다. 우리네 조상들은 생계를 위해 나무하러 산에 올랐지만 서양인들은 도전 정신으로 산에 올랐다. 소쉬르(스위스의 자연과학자)가 ‘악마가 산다’는 알프스 몽블랑에 상금을 건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올라가는 등정주의에서 이후 등로주의로 변해왔다. 하지만 한국 산악인들은 등로주의를 모른다. 등로주의가 뿌리 내릴 수 없었던 거다.     

-진주에 와선 무엇을 했나. 

막상 뭘 해보려고 해도 산 관련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프로가이드’라고, 동성상가에 회사를 차려 산행을 위한 가이드를 했었다. 내 첫 직장도 진주였는데 ‘마운틴보이’라는 안전벨트 만드는 회사였다. 주인 1명에 종업원 1명(웃음). 여튼 ‘프로가이드’ 하면서 백두산도 가고 알프스도 갔다. 그땐 참 잘 됐다. 산도 사실은 경영과 비슷하다. 사회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배운 것들을 그런 데 초점을 맞춰 해보니까 잘 됐다. 2, 3년간은 재밌게 보냈다. 그런데 2, 3년 지나니까 또 슬슬 히말라야 생각이 났다(웃음).  

-결국 또 떠났나.

당시 순천 학생 연맹에서 K2를 가려고 했다. 그때 K2 입장료가 1500만원 정도 했다. 그런데 인원 확보가 안 돼서 그 계획이 취소 위기에 놓인 거다. 그 소식을 듣고 순천으로 가서 그쪽 대장님에게 퍼미션을 공짜로 받았다. 너무 가고 싶은데 어떻게 주면 안 되겠냐, 팀 구성은 어떻게든 해보겠다, 이러고. 물론 나머지 돈을 충당해야 하는 문제는 있었다. 백방으로 3천만원 정도를 모았다. 그런데 K2 등정에 실패했다. 실패하고 109일을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99년도에 퍼미션을 줬던 분이 2000년도에 한 번 더 가라고 원정대를 밀어주셨다. 재정적인 부담 없이 가서 무산소로 K2 등정에 성공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인원(8명)이 K2에 올라 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 

-갔다 와선 무엇을 했나.

2000년도부터 한국도로공사 산악팀 만드는 팀장 역을 맡았다.

-공무원이 된 건가.

그렇다. 조건은 최상이었다. 내가 맡은 그 산악팀이 한국 첫 프로 산악팀이었다. 팀은 지금도 후배들이 이끌고 있다. 나는 2004년 8월에 나왔다. 조직 속에 있으니까 내가 가고 싶은 산을 갈 수 없었다. 그나마 조직 속에 있으면서 한 일들 중 가장 보람 있었던 건 2002년 에베레스트에 첫 한국 이름 루트 ‘코리안 하이웨이’를 개척한 것이다.

촐라체 조난 이후 6년 만인 2012년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박정헌 대장. 그는 생애 목표 중 하나였던 무동력 패러글라이딩 2400km 히말라야 횡단에 성공한다. 저 멀리 에베레스트가 보인다.
촐라체 조난 이후 6년 만인 2012년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박정헌 대장. 그는 생애 목표 중 하나였던 무동력 패러글라이딩 2400km 히말라야 횡단에 성공한다. 저 멀리 에베레스트가 보인다.

◇ 갤러리, 진주에 다시 연다면 교육청 옆 건물이 최적지

-그런 위대한 경험들을 일반인들과 공유하기 위해 노력한 걸로 안다.

히말라야 문화를 너무 좋아해서 칠암동에 갤러리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돈만 날렸지만(웃음). 4년 동안 유지하다 얼마 전에 철수 했다. 서울 쪽 지인들이 많이 왔고, 가수 이문세도 오고 싶어 안달이었다. 원래는 서울 인사동에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나는 ‘그래도 고향이 문화의 도시인데 여기에 만드는 게 맞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웃음).

-안타깝다.

세계문화유산을 갖다 놓고 입장료도 받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은 입장료 만원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거기에 대고 나는 ‘무슨 지방에서 만원이나 받나’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입장료를 받아야 그게 가치 있는 건줄 알고, 공짜면 별로 가치 없는 건줄 안다는 걸 알았다. 많은 아쉬움을 남긴 일이었다.

-입장료를 받는 게 맞았을 것 같다.

히말라야 관련 장비와 사진들을 세계에서 내가 제일 많이 가지고 있다. 진주 장재동에 수장고가 있는데 자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쌓여 있다. 갤러리는 다시 열 거다. 후배가 와서 매일 백업 하는 등 현재 내가 가진 모든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 시키고 있다. 사회적 펀딩을 좀 받아 법인도 만들고 해서 해나갈 예정이다.

-다시 열어도 진주인가.

지금 고민 중이다. 진주가 아니라면 서울보다는 제주 쪽도 염두에 두고 있다.

-진주라면 어디에?

사실 교육청 옆에 비어있는 건물이 제일 탐난다. 

-과거 배영초등학교 자리.

이야기는 한 번 해볼 거다. 박물관 만들 자리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직 결정된 건 없더라. 다시 진주에서 갤러리를 연다면 그곳이 최적지라고 생각한다.   

-서울에 가고 싶은 유혹은 없나.

예전엔 많았다. ‘이카로스의 꿈-히말라야 2,400km를 날다’(KBS 공사창립특집 글로벌기획 3부작 다큐멘터리. 2012년 방영됐다.) 때도 투입된 비용이 5억 정도였는데, 여기선 불가능한 액수지 않나. 서울과 진주는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그땐 내가 운도 좋았던 것 같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인데 진주시가 너무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대기업들도 강조하는 게 결국 인재다. 알고 보면 진주에도 좋은 장인들이 정말 많다. 뭔가를 하겠다는 젊은 친구들도 많고. 그런 사람들을 많이 살려야 한다. 사실 ‘이카로스의 꿈’을 만든 피디와 작가도 다 진주 사람이었다. 나는 갤러리 할 때만 해도 프라이드가 있어서 갤러리에 오지 않으면 취재에도 응하지 않았다. 타 지역 사람들도 나를 만나기 위해선 다 진주로 와야 했던 거다. 그 사람들이 오면 이제 진양호, 진주성 다 구경시키고 보내고 그랬다(웃음).        

-진주를 열심히 홍보했다(웃음).

진주 사람들이 진주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고 산다. 백두대간의 거점이라 일컫는 진양호 꽃등실도, 진주에서 가장 예쁜 곳 아닌가. 매해 내가 200명씩 사람들을 모아 산행 하는 곳이기도 한데. 기업에서 강연할 때 놀란 게 100명 중에 한 사람도 독도를 가본 사람이 없는 걸 알았을 때였다. 나는 우리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아이들에게 우리 땅을 제대로 체험할 기회를 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북한 백두대간을 다 걸어본 로저 셰퍼드 같은 사람도 백두대간은 최고라며 한국의 산티아고로 만들자고 했다. 우리와 달리 일본 사람들은 아이들 반바지 입혀서 자기 나라 땅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구석구석 데리고 다닌다. 우리는 기껏해야 놀이동산 데려가 놀이기구 태우는데 말이다. 한국인들은 자기 땅에 대한 애착심을 좀 더 가질 필요가 있다.

한국도로공사 산악팀 팀장으로 근무하던 2002년, 박 대장은 에베레스트에 첫 한국 이름 루트인 ‘코리안 하이웨이’를 개척했다. 개척 당시 그는 ‘국가대표’라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한다.
한국도로공사 산악팀 팀장으로 근무하던 2002년, 박 대장은 에베레스트에 첫 한국 이름 루트인 ‘코리안 하이웨이’를 개척했다. 개척 당시 그는 ‘국가대표’라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한다.

◇손가락 8개 앗아간 ‘마의 산’ 촐라체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었다”

-‘이카로스의 꿈’ 얘기를 해보자. 2400km 히말라야 횡단. ‘패러글라이딩 크로스컨트리’라는 개념을 도입한 매우 대담한 기획이었다.

히말라야 비행은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땅에 발이 닿을 때까지 위험하다. 그래도 한 것은 내가 어느 순간부터 등산을 할 수 없게 됐잖나.(박 대장은 2005년 네팔 촐라체 북벽 원정에서 사고로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잃었다.) 그런데 히말라야는 차마 내칠 수가 없고. 히말라야 산 위에서 보는 그림은 정말 예쁘다. 그리고 그 정상에 섰을 때 세상을 내려보는 쾌감. 파드마 삼바바(연꽃 봉우리 안에서 태어난 부처)가 이상향의 세계,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통로로 가는 문서 18개를 히말라야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람이 그걸 왜 히말라야에 묻었을까. 바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히말라야이기 때문이다. 진짜 거기 눈밭(Snow Lake)에 서 있어 보면 바로 눈밭이 갈라지면서 마징가Z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웃음). 사람이 아닌, 마치 손오공이 만든 것 같은 이상적인 곳들이 히말라야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다.

-이미 많은 인터뷰들과 소설(박범신 작품 ‘촐라체’)로 세상에 알려졌고, 본인으로서도 다시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겠지만 촐라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75도 경사에 1800미터 수직 고도. 상상이 안 된다.

에베레스트 경사가 35도니까, 뭐, 상상하기 힘들 거다. 실제 등반 거리는 2500미터였다. 

-두려웠겠다.

산 앞에 서면 무섭다. 그래서 쉽게 다가가질 못한다. 촐라체 때는 베이스캠프에 15일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15일 동안 그 산을 보고 있으면 매일 1도, 2도씩 산이 눕는다. 마음에서 경사도를 지워나가는 것이다. 결국 15일이라는 시간은 산에 오를 사람이 두려움을 지우는 시간인 셈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지 못하면 출발하지 못하고 돌아서야 한다. 그 두려움을 없애는 시간이 적게 걸리는 사람일수록 더 빨리 산을 향해 출발할 수 있다.

-하산 때 크레바스(빙하 틈새)에 빠졌던 최강식씨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경상대 산악부에 있던 친구였다. 나와는 ‘가로왈 청소년 오지 탐사대’를 함께 했었다. 그때 보면서 괜찮은 애라고 생각했다. 이후 산행을 같이 하기 시작해서 촐라체까지 간 거다.

-강식씨는 프로는 아니지 않았나.

맞다. 산악부 출신이고 사범대 체육학과여서 체력도 좋았다. 3년 동안 나와 히말라야를 다니면서 내가 검증을 했고 같이 갈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촐라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어려웠다. 무엇보다 강식이는 재밌는 친구였다. 산을 가보면 일단 무료하다. 기왕이면 함께 가는 사람이 재밌으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촐라체봉 하산 중에 큰일을 당했다. 70kg이었던 당신이 크레스바에 빠진 78kg의 강식씨를 끌어올려야 했던 상황이다. 자일파티(한 줄로 몸을 연결한 등반 동료)였던 강식씨는 두 다리가 부러졌고 줄을 잡는 과정에서 당신은 갈비뼈 두 개가 나갔다. 돌아와서는 두 사람 모두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하는 아픔을 겪었고. 사고 당시엔 저승사자를 세 번 만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운명과도 같았다. 그래도 우린 운이 좋았다. 살아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그 상태로 몇 시간을 버틴 건가.

크레바스에서 두 시간 정도 버텼다. 그냥 촐라체는 출발부터 돌아오는 순간까지, 그 일주일은 그냥 죽는 게 나았다. 춥고 배고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선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들다.

-버티면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가. 대화를 나눌 수는 있었는지.

두 사람 다 끙끙대면서 ‘살아있다’는 말 정도 주고받았다. 우리가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등강기라는 기계와 로프가 있었던 덕분이다. 여러 가지로 잘 맞았다.

-주위에서 8000미터 14좌를 다 올라보라는 권유를 했을 때 “그건 내가 해온 일에 대한 윤리적 배신”이라는 답변을 한 것이 인상적이다. 무슨 뜻인가.

내가 알기에 8000미터 다 오른 사람이 한국에만 여섯 명인데, 세계에서 한국인이 제일 많다. 그런데 고봉 14좌 완등은 내가 지향하는 노선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것보단 오히려 히말라야 패러글라이딩 횡단이 나에게는 더 가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다.

-등반과 패러글라이딩 중 어떤 게 더 힘든가.

패러글라이딩이 산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들다. 산은 한 번 오르면 끝나는데 패러글라이딩은 그런 게 없으니까. 또 무동력 패러글라이딩은 확실한 이륙장도 확실한 착륙장도 없다. 그게 제일 힘들다. 물론 환상적이긴 하다. 인간이 하루 직선거리 108km를 날아간다고 상상해봐라. 당연히 겁이 난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니까. 그래도 너무너무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 한 거다. 

-촐라체 등정까지가 제1의 삶, 히말라야 대종주까지가 제2의 사람, 나머지가 제3의 삶이라고 들었다. 제3의 삶을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지난해부터 클라이밍을 다시 시작했다. 11년 만이다. 더 많은 자연을 만나기 위해선 자연을 즐기기 위한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 다른 지구 탐험을 할 예정이고, 갤러리를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다. 특히 지구탐험은 그동안 배웠던 익스트림한 것들을 총동원해 해나갈 예정이다. 방송국을 끼고 SNS를 통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송출하는 아이템을 구상 중이다.

-예티 클라이밍 짐은 직접 설계한 것인가.

내부 설계는 내가 직접 한 것이다. 이 공간은 시장님이 네팔에 갔을 때 임대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한때 지역 체육계에서 난리가 난 적이 있다. 진주시에서 여기 투자해준 줄 알고(웃음). 완전한 오해였지. 예티 클라이밍은 시에서 10원도 투자하지 않은 공간이다.

-임대료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맞다. 혁신도시 시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임대료를 매달 내고 있다. 다른 도시들은 이런 체육 시설은 시에서 다 짓는다. 유럽 도시들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내가 지구 탐험을 떠나면 이 공간을 진주시에 기부할까 생각 중이다. 아는 후배 둘 정도에게 관리를 맡기고. 이걸 들고 갈 수는 없으니까(웃음). 

-강연과 책 집필 활동은 어떤가.

강연은 꾸준히 하고 있다. 강연 없으면 먹고 살기 쉽지 않다(웃음). 책 집필도 근래 일이 있어서 브레이크 돼 있던 상태인데 다시 쓸 예정이다. 제목은 ‘끈을 놓다’가 될 것 같다. 앞서 쓴 책 ‘끈’의 후속으로 보면 된다. 촐라체 사고 당시 쓰지 못한 내용들, 사고 이후 삶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와본 사람으로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린다.

과거 산림청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 당시 산림청장님, 혜민스님과 함께 각자 15분씩 한 강연이었는데, 그때 내가 한 말이 우리 세 사람이 각자 자리에서 최고 자리에 올랐다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산림청장님은 공부만 해서 저 자리 올라가신 것 아닐 테고, 국민의 멘토라는 혜민스님은 키가 작으셔서 항상 높은 운동화 신고 다니시고, 그리고 나 역시 이기적인 유전자로 가족들의 바람과 다른 삶을 살았고. 결국 가장 위대한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 가정과 사회를 지키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주인공이다, 라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이 우리 같은, 몇 프로 되지 않는 사람들을 동경하는 이유는 자기가 그 길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다 던지고 그 길을 간다 해서 자신에게 행복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산을 오르면서 철학을 가지게 됐고, 국가관을 가지게 됐다. ‘코리안 하이웨이’는 내가 국가대표라는 생각에서 산을 올랐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결과다. 사람은 집중할 때 존재의 가치가 생기고 중심이 생긴다. 자기 삶에 집중해라.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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