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2년만에 20억 매출, 신기록 진행 중
건축공무원 부친 권유로 토목공학과 진학

휴대폰에 2,500명 지인 전화번호 저장
학창 시절 진주에서 서울 자전거 완주

30대에 수십억대 매출을 올리고 있는 혜승건설 정재욱 대표. 그는 4살 때부터 인사동에서 25년을 살고 결혼 후 문산으로 이사 간 진주 토박이다.
30대에 수십억대 매출을 올리고 있는 혜승건설 정재욱 대표. 그는 4살 때부터 인사동에서 25년을 살고 결혼 후 문산으로 이사 간 진주 토박이다.

정재욱. 30대에 수십억대 매출을 올리고 있는 혜승건설 대표다. 그는 진주 호탄동에서 태어나 4살 때 인사동으로 이사, 거기서 25년을 산 진주 토박이다. 진주초등학교, 봉원중학교, 대아고등학교를 나와 건축 공무원이었던 부친의 권유로 토목공학과에 진학했다. 천성이 활발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이어서 경상대 재학 시절 공대 회장에 총학생회 회장까지 역임, 현재는 건설사 대표 직함 외 경상대 동문들로 구성된 개척산악회, 젊은 사람들의 진주 역사 공부 단체 진주청년포럼, 700만 소상공인 법정 대표단체 소상공인연합회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그의 휴대폰에는 2,500명 이상 지인들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대학 동문회의 발전과 선후배 간 소통을 강조하는 정 대표는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시공으로 진주 향토 기업의 성공 사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편집자주 

◇부모님 두 분 모두 공무원

-진주 ‘토박이’인 것인가.

△그렇다. 호탄동에서 태어나 4살 때 인사동, 지금 이마트 뒤로 이사 와서 25년을 살았다. 결혼 뒤엔 충무공동으로 넘어왔다. 

-인사동은 과거 그다지 발전된 동네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그래도 진주에서 네 번째로 들어선 아파트 ‘한주맨션’이 있는 곳이다.(웃음) 구시청 근처 시내권이기도 했고. 학교는 중안초등학교(현 진주초등학교)와 봉원중학교, 대아고등학교를 나왔다. 어릴 땐 진주성, 박물관을 놀이터 삼아 놀고 그랬다.

-기자도 봉원중학교를 나왔다.

△그런가.(웃음) 봉원중학교가 동문회가 없다.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신가?

△부모님께서 두 분 다 공무원이시다. 어머니는 산청군 보건 의료원에서 지금도 근무 하고 계시고 아버지는 진주시청 공무원이셨다. 그래서 두 분 다 보수적(정치적 의미가 아닌)이시다. 

-경상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는데, 어릴 때는 어땠나?

△어릴 땐 그다지 관심을 못 받았다. 초등학교 땐 전교 부회장, 중학교 2학년 때도 부회장에 머물렀다. 고등학교 땐 전교회장 나갔다 떨어졌고.(웃음) 초중고 때 내가 인기가 좀 있는 편이었는데 어머니가 철벽 방어를 하셨다. 행여나 애가 엇나갈까 해서였다. 

-부모님과 보낸 시간이 적었나 보다.

△공무원이 정말 바쁜 직업이다. 눈, 비 오면 어김없이 나가시곤 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나는 커서 공무원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남동생이 있는데 6살 차이다. 그래서 친구들과 많이 놀았다. 결정적으로 부모님이 공직 생활로 바빴던 터라 나는 할머니 손에 컸다. 유치원 때부터 할머니 손 잡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말투가 좀 올드하다.(웃음) 아버지가 막내셨는데 여건상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셨다. 남다른 효심에 부모님을 정말 존경하고 있다. 옛날엔 학예회에 젊은 엄마, 아빠 데려오는 애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와의 추억이 지금도 아련하고 많이 생각나곤 한다.

-어릴 땐 무엇을 하고 싶었나?

△어릴 땐 운동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땐 야구, 중학교 땐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는 막연히 대학 진학만 생각했다. 아버지가 건축과 나오셔서 토목과를 권유하셨다. 어릴 때 설계도를 끼고 사신 부모님 모습을 옆에서 봐왔던 터라 그 쪽으로 자연스레 진학했다. 정말 고등학교 땐 남자는 건설관련 일 밖에 없는 줄 알았다.(웃음) 

현장에서 작업 지시 중인 정재욱 대표. 그는 청렴과 ‘약속은 곧 실천’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임한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작업 지시 중인 정재욱 대표. 그는 청렴과 ‘약속은 곧 실천’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임한다고 밝혔다.

◇27살 때 토목기사 준비, 사업초 백지상태로 시작

-사업은 언제부터 생각했나. 

△대학 가서부터다. 대학 가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20살 때 과 모임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그 외 다른 모임들에도 나가는데 50, 60대 형님들과도 친하게 지낸다. 

-60대도 ‘형님’인가.

△무조건 형님이다. 그리고 모임 때 기본 신념이 생겼는데 ‘오래 봤던 사람이 자주 보는 사람을 못 이긴다’는 거다. 자주 보면 추억이 많아져 사이가 돈독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기본적으로 모임은 절대 안 빠진다. 나가서 형님들과 더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자주 본다. 그것이 소중한 인맥으로 이어진다. 생활에 쫓기다 보면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데 나는 모임과 관계 끈을 절대 놓지 않았다.

-현재 ‘혜승건설’ 대표로 있다. 어떻게 시작한 건가.

△27살 때 학생 회장을 하고 뒤늦게 토목기사 준비를 했다. 당시엔 경기가 안 좋아 들어갈 곳이 많이 없어 힘들었다. 그러다 진주에 있는 회사에 취직 했는데 첫 발령이 남양주였다. 취업과 더불어 결혼을 했는데 아내, 아이들과 2주에 한 번 보며 객지 생활을 했다. 남양주에서 6개월 거제에서 3개월. 그렇게 가족도 자주 못보고 일도 못하게 되면서 사업을 빨리 할 수 밖에 없었다. 혜승건설은 2014년 8월에 문을 열었다.

-아내 분도 진주 사람인가.

△마산 사람이다. 후배 소개로 만났다. 2009년 학생회장 임기 끝나고 2010년 토목 기사 공부할 때 만나 부부가 됐다. 웃는 얼굴과 밝은 모습에 반했다. 당연히 예뻐서 따라다녔다.(웃음)

정재욱 대표(왼쪽 끝)는 ‘2017 소상공인의 날 기념식’에서 경남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표창장을 받았다.
정재욱 대표(왼쪽 끝)는 ‘2017 소상공인의 날 기념식’에서 경남지방중소벤처기업청장 표창장을 받았다.

-아까 말씀대로 집안이 보수적이어서 힘든 점이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다른 집들보다 집안 대소사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있다. 제사, 벌초 외 집안 형님들도 다 챙겨야 하고. 그런 의무감 같은 게 있긴 한데 아내도 외동에 장녀여서 상황을 다 이해하고 따라와준다. 별 문제 없다. 

-건설 경기는 늘 안 좋다는 말이 있다.(웃음)

△(웃음)아니다. 경기 좋다. 사람들은 늘 안 좋다고 하는데.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힘든 점은 없었나.

△가업을 물려받은 게 아닌 완전히 새로 시작한 일이어서 힘든 점이 많았다. 영업 방식, 서류 작성 등 모든 것들에 무지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땐 마냥 잘 되겠지 하는 자신감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도와줄 사람들이 아쉬웠다. 처음엔 면사무소 위주로 가면서 토목직 주사님들께 인사하면서 다녔다. 면에서 꺼려하는 것들 하면서 경력을 쌓았고 적게는 50만원 규모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업계 신인이라 검증이 안 되었으니 일을 주는 입장에서도 애매했을 거다. 그렇게 배워가면서, 선배들에게 자문도 구하며 초반엔 전화기를 붙들고 살다시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질문들을 하고 그랬다.(웃음) 

-매출을 밝혀줄 수 있나.

△본격적으로 일을 한 건 2015년부터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나 작년에 20억 정도 매출을 올렸다. 그렇다고 큰 공사는 아니고 하도급 받으면 5,6억, 면 단위 공사와 사급 공사가 비슷하게 2,3억 규모다.

◇경상대 총학생회장 시절 ‘교명변경’ 주장

-경상대 총학생회 시절 교명 변경을 주장했다.

△경상대학교는 강원대, 경북대, 충남대, 충북대 등과 같은 거점 국립대학교다. 하지만 거점 대학임에도 ‘경남대’라는 이름을 못 쓰고 있다. 창원에 같은 이름의 사립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경상대는 도 이름을 못 쓰는 유일한 국립대학교인 셈이다. 

-진주시민들은 잘 모르는 사실일 것 같다.

△맞다. 2009년, 2010년에 언론들이 다루긴 했는데 여전히 시민들의 관심 밖인 것 같아 아쉽다. 경남대라는 이름을 못 쓰는 대학은 경상대가 아닌 경남대가 되어야 한다. 경상대는 경남대라는 이름을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대안이 ‘경상도의 거점학교’다 해서 경상대가 된 거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학생들이 취직할 때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가령 서울 기업들은 경상대를 일반 단과 대학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경북대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이유도 바로 경상대라는 이름 때문이다. 교명 변경은 내가 총학생회장 때 숙원사업이었다. 경상대를 경남대로 바꾸는 일은 동문회를 넘어 지역의 이슈다. 이 문제가 한창 불거졌을 때 마산 사람들은 경남대를 지키기 위해 플랜카드를 거는 등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진주는 그런 게 없어 아쉽다. 

-그래서 자전거 투어를 돈 것인가.

△맞다. 돈이 없으니까 몸으로라도 홍보해야 했다. 총학생회장 선거 때 내 공약이 ‘취업 잘 되게 하는 대학’ ‘1인1책상 갖기’ ‘무료 토익 시험’ ‘해외유학 관련 박람회 혜택’ ‘면접 관련 컨설팅’ 등이었는데 가장 강조한 것은 역시 교명 변경 문제였다.

-자전거를 타고 진주에서 서울까지 간 것으로 안다.

△남녀 학생 40명이 경상대 정문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450여㎞, 5박6일 일정이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갔다. 첫날밤은 함양군에서 제공해준 체육관이었는데 군수님과 면담 하고 지역민들 동의도 구했다. 진주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충남 금산군에서 제공해준 숙소에서도 잤는데 충남대생들은 잘 모르고 있어서 그쪽에 자전거 투어 취지를 설명 해주고 그랬다. 과거 경기도에서 판례가 있었다. 한경대가 경기국립대학교라는 교명을 쓰려고 했는데 경기대가 맞선 것이다. 대법원은 ‘‘경기대’와 ‘경기국립대’는 혼동이 오기 때문에 ‘경기국립대’란 교명을 사용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며 경기대 손을 들어주었다. 그럼에도 경상대는 ‘경남국립대학’으로라도 가야 한다. 이는 시민들은 물론 선배들이 특히 많은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경상대 동문으로 구성된 개척산악회는 1년에 한 번 해외 산행을 한다. 사진은 올해 갔다온 발리 아궁산 산행 모습. 아궁산 화산은 현재 폭발 ‘위험단계’로 격상돼 반경 10m 10만여 명에게 대피령이 내려진 상태다.
경상대 동문으로 구성된 개척산악회는 1년에 한 번 해외 산행을 한다. 사진은 올해 갔다온 발리 아궁산 산행 모습. 아궁산 화산은 현재 폭발 ‘위험단계’로 격상돼 반경 10m 10만여 명에게 대피령이 내려진 상태다.

◇대학 선후배 소통 가교 역할 하고파

-총학생회장을 지낸 뒤 무엇을 느꼈나.

△지역 차원에서 실제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의 가려운 곳을 깊숙이 긁어주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줘야 한다. 개척 산악회, 동문회 집행부 등 나는 졸업 뒤에도 후배들을 챙기고 싶고 동문회를 살리고 싶다. 내가 필드를 뛰어본 만큼 선배들과 후배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

-개척 산악회는 경상대 관련 모임 같다.

△경상대 동문 산악회다. 총학생회장 때 산악회에 초청된 것이 인연이 돼서 합류한지 벌써 9년 차다. 20~30대 회원 10명 정도가 매달 산에 간다. 1년에 한 번 해외 산행도 한다. 재작년에는 대만 설산, 작년에는 러시아 바이칼 호수, 올해는 발리 아궁산에 갔다 왔다. 물론 땅만 보고 걸어서 어디 산을 갔는지 다는 기억 못한다.(웃음) 젊은 후배들과 동기들과 동문 사랑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이 역시도 사람이 좋아 가는 거다. 다만 동문들의 관심이 식어서 산악회가 활기를 띠진 못하고 있다. 동문회에서 가장 중요한 모임은 산악회인데 아쉬운 부분이다. 혹 참가하고 싶은 동문은 개척 산악회 총무()에게 전화를 주면 된다.

-진주청년포럼 회장을 지내고 있다. 어떤 곳인가.

△진주 역사를 공부하는 모임이다. 현재 회원은 21명. 경남역사문화연구소 진주향당의 산하 단체로 예술회관 맞은 편에 있다. 나는 진주가 뺏기는 것에 길들어 있다고 본다. MBC도 뺏겼고 경상대 교명도 마찬가지다. 다 줘버렸다. 청년들이 역사를 알아야 진주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필리핀과 캐나다 어학연수를 갔다 온 것으로 안다. 둘 다 장기 유학이 아닌 단기 어학연수다.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군대에 가보니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겨울이면 스키, 여름 되면 외국 나가는 게 그들 삶이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생각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까지 난 스키를 한 번도 안 타봐서.(웃음) 수준을 따라잡아야겠다 생각했고 미국 보스턴행 계획을 잡아놨다가 친한 형이 필리핀에 있어 견문 넓히는 차원에서 필리핀에 간 것이다. 거의 1대1 영어라 회화가 많이 늘었는데 발음이 아쉬워 밴쿠버 6개월 어학연수를 갔다. 좋은 경험이었다. 도시락 싸 들고 2시간씩 걸어 학원을 다니며 돈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진짜 ‘헝그리 정신’으로 살았던 기억이다. 

정 대표는 진주 역사를 공부하는 모임 ‘진주청년포럼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 회원은 21명. 그는 개척산악회와 진주청년포럼 활동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진주 역사를 공부하는 모임 ‘진주청년포럼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현재 회원은 21명. 그는 개척산악회와 진주청년포럼 활동에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나.

△춤추는 걸 좋아했다. 어느 날 밴쿠버의 한 나이트클럽에 갔다. 매월 마지막 주에 여는 ESL 학원생들의 파티였는데 거기서 하는 댄스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 상품은 10여 만원 상당 럭비 관람권 몇 장이었다. 워낙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까 캐나다에서도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지금도 메일 주고 받는 친구도 있고. 특히 다양한 계층과 연령에 대한 접근 방법을 거기서 많이 배웠다.

-경영철학이 있다면.

△청렴이다. 거짓말 하지 않고, 약속은 곧 실천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임한다.

김성대 기자 사진제공=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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