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에서 법집행과 인권이란 주제로 법학박사학위

사천 서포에서 태어나 하동 진교 중, 고등학교 나와
사천출신, 하동에서 중고교나와 정치입문 주목받아

문장 21에 ‘아버지’등 시를 통해 정식시인으로 등단
2016년 청암에서 제1 시집 ‘거울 속 시계바늘’ 출간

주용환 사천경찰서장은 시를 쓰는 경찰이다. 시를 쓰는 경찰서장에 대해 사람들은 “경찰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해 경찰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한다”고 평가한다. 사진=박청기자
주용환 사천경찰서장은 시를 쓰는 경찰이다. 시를 쓰는 경찰서장에 대해 사람들은 “경찰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해 경찰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한다”고 평가한다. 사진=박청기자

주용환(59) 사천경찰서장은 시를 쓰는 경찰이다. 우리나라 전체 경찰을 털어 시를 쓰는 경찰서장은 유일하다 할 만큼 특이한 사람이다. 하동경찰서장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부임해 가는 지역마다 그 지역 특산물 등으로 시를 써서는 행사 때 낭송하기도 해 인기를 끌고 있다. 처음에는 경찰서장이 시를 써와서는 낭송을 하니 이상하게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알려져 오히려 낭송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이다. 시를 쓰는 경찰서장에 대해 사람들은 “경찰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해 경찰에 대한 인식을 좋게 한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좀 튀는 사람이네...”하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다.  

시를 쓰는 주 서장은 1958년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에서 태어났다. 동네인 금진리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다음 주 서장은 이웃 군인 하동군 진교면에 있는 진교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당시 진교중학이 자신이 태어난 서포면에 있는 서포중학교보다 더 가까워 진학했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진교고등학교를 나와 마산에서 대학을 다녔다. 

1985년 대학 졸업 후 경찰간부후보생으로 경찰에 투신해 지금까지 약 33년간 경찰조직에 몸을 담고 있다. 경찰조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학구열을 이기지 못해 

주용한 경찰서장이 5월 가정의 달에 맞추어 쓴 시 ‘아버지’. 시가 좋아 부산지하철 간부들과 저녁식사자리에서 “부산지하철 내에 붙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공식 등단되지 않은 시는 게재기준에 어긋나 지하철에 붙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주 서장의 등단 계기다. 사진=박청기자
주용한 경찰서장이 5월 가정의 달에 맞추어 쓴 시 ‘아버지’. 시가 좋아 부산지하철 간부들과 저녁식사자리에서 “부산지하철 내에 붙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지만 공식 등단되지 않은 시는 게재기준에 어긋나 지하철에 붙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주 서장의 등단 계기다. 사진=박청기자

연세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한양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법학박사학위는 평소 늘 관심을 가지고 있던 법집행에 있어서의 인권문제를 다루었다. 법을 집행하는 입장에 있으면서 인권과의 경계선이 어딘지 늘 고민했던 바를 학문적으로 연구해 본 것이다. 

기관장인 총경으로 승진한 후에는 하동경찰서장, 통영경찰서장, 밀양경찰서장, 부산동부경찰서장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고향인 사천경찰서장으로 올해 6월 부임했다. 주 서장은 퇴임을 앞둔 끝머리에 자신의 고향에서 그래도 서장을 마무리하게 돼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향의 경찰서장으로 부임해 그는 고향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주 서장이 시를 쓰게 된 것은 하동 경찰서장을 할 때이다. 축제 때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시를 써 보낸 것이 계기가 돼 아예 그길로 들어서 버렸다. 그 이후는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특산물 등을 소재로 시를 써서는 행사 때 낭송하기도 해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다. 딱딱하기만 하다고 생각한 경찰서장이 시를 써서 낭송을 하니 처음에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그의 시가 우리가 잊어버린 추억을 건드릴 때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2013년 문장21을 통해 정식 시인으로 등단까지 한 주 서장은 노년의 특기를 하나 다듬은 셈이다. 

주 서장은 사천에서 태어나 하동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닌 특이한 경력 때문에 정치적인 주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그는 정치적 진로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은 주 서장과의 인터뷰 내용 전문 - 편집자주

-------------------------------------------------------------------------------------------------------------------------------------------------------

-출생지가 어디인가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소모부락이다. 20여 가구 되는 마을인데 모두 농사를 업으로 하고 있는 동네다. 아버지가 워낙 부지런하셔서 이 동네 논 20여마지기를 농사를 지었다. 당시는 마을에서는 가장 부자였다. 산도 있고 밭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논은 거의 다 팔았고 산과 밭은 아직 남아있다. 동생이 아직 고향에 살면서 산과 밭을 지키고 산다.

-형제가 몇인가

△8남매인데 모두 다 잘 컸다. 저는 셋째다. 형제들은 공직자가 많다. 면서기라도 하라는 게 아버님 뜻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형제들이 공직에 진출했다.

-학교는 어디를 다녔나.

 

마을에서 논 20여마지기 짓는 부농의 셋째

△초등학교는 마을에 있는 금진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부터는 진교중학교와 진교고등학교를 나왔다. 제 직전에 사천경찰서장을 한 최영철 총경이 금진초등학교 출신이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관할 경찰서장이 두 명이나 배출된 것은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진교중학교와 진교고등학교는 하동군에 속했는데 왜 하동으로 진학을 했나.

△서포면에 서포중학교도 있었다. 그런데 제 집에서 진교중학교가 조금 더 가까웠다. 그리고 당시 진교중학교가 서포중학교보다 조금 나은 학교였다. 그래서 시험을 쳐서 입학을 했다. 우리 때에는 중학교를 시험을 쳐서 들어가는 시대였다. 진교중학교는 전교에서 10등 이내에 들면 부산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진주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 등에 진학할 수 있는 좋은 중학이었다. 

-그럼 10등 이내에 들지 못했나.

△저는 아마 10등 내외의 등수를 했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진주나 마산 부산 등으로 유학을 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 당시 진교농고가 종합고등학교가 되면서 진교고등학교로 개명이 됐고 인문계반이 생겼다. 그래서 진교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 됐다. 당시 조금 욕심을 내 진주로 나갔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평생 하면서 지냈다. 고등학교를 좀 더 큰 곳으로 갔더라면 인생이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진교중학교 출신으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

△권병현 주중대사 같은 분이 진교중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제 동기 중에서도 밀양에서 정형회과 병원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만큼 진교중학은 당시로서는 인재들이 모여있는 학교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어떻게 했나.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바로 취직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형님이 계시는 서울로 올라갔었는데 취직이 잘 안됐다. 그래서 도로 시골로 내려왔다. 대학을 가긴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경남대학에 진학을 했다. 

동네에서 가까워 이웃 하동군의 진교중학교에 진학

-경찰에는 언제 투신하게 됐나.

△경찰간부후보 시험을 쳤는데 1985년 2월 25일 날 합격통시를 받았다. 그런데 이날은 대학 졸업식 날이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어 학교 교학실로 합격연락이 왔더라. 그래서 졸업식날 취직이 된 셈이다. 요즘 취직이 안 돼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운이 좋았던 셈이다. 

-첫 발령지는 어딘가.

△청와대 101경비단이다. 청와대 내부를 경비하는 경찰조직이다. 

-청와대로 발령이 났으면 출세코스 아닌가.

△그렇다. 101경비단 출신들이 대부분 지방청장이라도 하고 퇴직을 할 정도로 엘리트 코스이다. 이 지역의 어청수 청장도 101경비단 출신이다. 

-그런데 왜 청장이 되지 못했나.

△총경이 되기 전까지는 제가 동기들 중에서 승진이 제일 빨랐다. 그런데 총경 승진부터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맥도 중요해서 그런지 승진이 늦었다. 제가 진주고등학교만 졸업했더라도 벌써 경찰청장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에는 어떤 보직들을 맡았나. 

△2년 후에 강남서로 발령이 났고 주로 서울에서 근무를 했다. 

-주요 특기가 무엇인가.

△저는 수사통이다. 수사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저는 간부니까 제가 직접 현장에 범인 잡으러 뛰어 다니지는 않았지만 기획수사 등을 많이 했다. 

-수사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나.

△아직 현직에 있고 또 수사에피소드는 외부에 말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게 평소 지론이다. 그래서 수사에피소드는 말하지 않겠다. 

-부인도 경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강남서에 있을 때인데 선볼 시간도 없어서 장가를 가지 못한다고 조직에서 얘기를 해서 그런지 서울 본청으로 발령을 내 주더라. 그래서 본청에 가서 거기 근무하는 여자경찰과 결혼을 하게 됐다. 

-지금도 부인이 경찰에 있나.

△아직 경찰에 있다. 서울의 모 경찰서 과장으로 근무 중이다. 저보다 늦기는 하지만 퇴직이 다돼간다. 

주용환 서장이 지난해 출간한 시집 ‘거울 속 시계바늘’. 제목 ‘거울 속 시계바늘’은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한 ‘추억 속 이야기’라는 의미다. 사진=박청기자
주용환 서장이 지난해 출간한 시집 ‘거울 속 시계바늘’. 제목 ‘거울 속 시계바늘’은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한 ‘추억 속 이야기’라는 의미다. 사진=박청기자

치안본부 근무시 경찰인 부인 만나 결혼

-경찰서장은 어디를 거쳤나. 

△제일먼저 하동경찰서장을 했고 다음에 통영, 밀양, 부산 동부서를 거쳐 현재 사천서장으로 왔다. 

-고향인 사천서장으로 늦게 온 편이다. 

△사실 하동서장을 마친 다음에 사천서장으로 오고 싶었다. 경찰조직에 있으니 그래도 고향에서 서장은 한번 해야 하지 않겠냐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사란 게 마음 같지 않아서 사천서장으로 오는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통영, 밀양 등으로 한참 돌아 온 거다. 저는 평소에 4수만에 사천서장으로 왔다고 농담 삼아 말한다. 그래도 조직을 떠나기 전에 고향의 서장을 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  

-경찰에 30년 이상을 몸담고 있는데 평소 지론이 무언가.

△저는 범인을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범죄예방이 더 중요하다는 게 평소지론이다. 범죄예방론에서는 제가 우리나라 1인자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경찰서를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예방치안을 많이 한다. 

-예방치안이라는 게 뭐냐.

△음주운전 단속을 하는데 있어서도 단속보다는 술을 먹고 사고내지 않도록 하는데 초점을 둔다는 의미이다. 보통 음주단속 때 “몇 건 잡았으니 일찍 들어가 쉬자.”는 식으로 단속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새벽에 교통사고가 나버린다. 음주단속도 교통사고를 내지 않도록 하자는 게 근본취지인데 하다 보니 단속건수 위주로 흘러가게 된다. 저는 사천서에서도 그렇지만 이전에 있는 서에서도 단속건수 보다는 예방위주의 단속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건 인기가 없겠다. 

△그렇다. 경찰의 모든 포상이 범죄체포건수나 단속건수 등을 근거로 시행되기 때문에 예방치안에 대해서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런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예방치안이 훨씬 더 중요한 개념이다. 

 

범인 검거보다 예방 치안이 더 중요하다는 게 지론

-박사학위는 언제 받았나.

△한양대에서 2008년도에 받았다. 총경 승진과 동시에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평소에도 인권에 관심이 많았다. 경찰은 법을 집행하는 조직이다. 그렇다 보니 집행하는 과정에서 인권과 부딪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것을 이론적으로 연구해 보기 위해 박사과정에 진학을 했다. 원래는 인권과 법집행의 한계에 관한 연구를 하려고 했는데 국내연구가 전무해 이 분야를 하지는 못했다. 대신 체포제도에 관한 연구로 방향을 틀어서 조금 쉽게 접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오늘 인터뷰 취지는 사실 서장의 경찰에 대한 얘기보다는 詩에 대한 얘기를 주로 하기 위해 만났다. 시를 쓰는 경찰이란 특이한 모습 때문에 인터뷰가 된 거다. 시는 어떻게 해서 쓰게 됐나. 

△시를 쓰게 된 것은 하동경찰서장 할 때이다.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하동에서 어떻게 시를 시작하게 됐나. 

△그렇다. 하동경찰서장 할 때인 2009년도에 하동이 문학수도 선포식을 했다. 하동이 고향인 정구영 전 검찰총장 동생인 정순영교수가 위원장을 맡아서 하동을 문학수도로 선포하는 그런 행사였다. 그런데 하동군에서 행사를 하기 전에 책을 만든다고 글을 한편씩 써서 제출해 달라고 요청을 해 왔다. 그래서 글은 다른 사람들도 다 써 보내니까 글을 쓰는 것 보다는 詩를 하나 써서 보냈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 고향 하동’이라는 시를 써서 보냈더니 위원장인 정순영 교수가 제 시를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경찰서장이 시를 쓰면 우리 같은 사람은 뭐 먹고 사느냐?”고 농담을 하시면서 칭찬을 해 주셨다. 그래서 속으로 내가 쓴 게 시가 되는 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 되는 대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코스모스 축제 때도 써서 보내고 다른 시들도 써서는 하동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처음 시작한 열정이 있어서 그런지 많은 편을 썼다. 

-통영 경찰서장 할 때도 많이 쓴 것으로 아는 데

△통영에 있을 때도 멍게, 굴, 도다리쑥국, 멸치, 욕지도, 물메기 등 통영의 소재로 시를 썼다. 그래서 통영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주로 그 지역의 소재로 시를 쓰는가.

△저는 어려운 게 질색이라 그 지역에 익숙한 소재들로 시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의 공감을 더 얻는 측면도 있다. 

주용환 경찰서장은 8남매 중 셋째다. 그에 따르면 “면서기라도 해라”는 아버님 뜻에 따라 형제들 대부분이 공직에 진출했다고 한다. 사진=박청기자
주용환 경찰서장은 8남매 중 셋째다. 그에 따르면 “면서기라도 해라”는 아버님 뜻에 따라 형제들 대부분이 공직에 진출했다고 한다. 사진=박청기자

 

통영서장 때 멍게, 굴, 도다리쑥국, 멸치 등 소재로 좋은 평가받아

-등단은 언제 했나. 

△등단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등단하라는 말은 통영에 있을 때 들었다. 통영에 있을 때 서울에서 온 사람들과 모임에서 ‘고향설’이라는 시를 낭송을 한 적이 있다. “대목장날 어머니 이고 오신 커다란 다라이속에 생선자반 운동화 나란히 누워 있네...”로 시작되는 시이다. 그런데 제 시를 듣더니 그 사람들이 등단을 하라는 거다. 그런데 저는 고향설에도 ‘다라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노가다’ 등 일본말이 근원이 된 말을 시에 자주 쓴다. 제가 일본을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릴 적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거다.  만약 ‘다라이’라는 말을 ‘함지박’으로 하면 그 느낌이 나오지 않고 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원래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우리가 어릴 적 쓰던 그 언어를 쓰는 거다. 그런데 이것을 정색하고 보면 왜색이 될 수도 있어 등단하지 않을 거다, 라고 말했다. 굳이 제가 등단을 해야 할 필요도 없는데 제가 쓰고 싶은 단어도 못쓸 바에야 그럴 필요가 있는 가 싶어 등단하라는 제안에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등단을 하게 됐나. 

△부산 동부서장을 할 때이다. 그때 부산지하철 간부들과 저녁식사자리가 있었다. 저는 시를 쓰고 난 후부터는 모임에 가면 꼭 시를 가지고 가서 낭송을 한다. 그때가 5월이어서 가정의 달이기도 하고 해서 ‘아버지’라는 시를 가지고 갔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막걸리 한 사발 내손으로 대접 못한 것이 평생 마음에 걸립니다...”로 시작되는 시이다. 이 시가 좋다고 모임에서 부산지하철 내에 붙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더니 다음날 홍보팀에서 찾아왔더라. 홍보팀에서 와서는 등단을 했느냐고 물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공식으로 등단이 되지 않은 경우는 게재기준에 어긋나서 지하철에 붙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 등단도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2013년에 문장21이라는 계간지에 시 몇 편을 보냈더니 게재가 됐고 신인상 까지 받았다. 그러면서 공식적으로 등단한 게 됐다. 

-본래 본인이 시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나.

△글쎄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시를 기억을 압축해서 담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 추억을 지금 와서 일기 쓰듯이 써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녔기 때문에 그 감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 제가 시를 쓰는 자양분이 된다고 생각한다. 만약 제가 고등학교를 큰 도시에 나가서 다녔다면 시를 쓸 수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어릴 적 추억을 중심으로 알기 쉬운 글로 시를 써

-그래서 주로 서정적인 시를 많이 쓰나

△그렇다. 저는 현대시의 난해함을 타파하자는 주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공감할 수 있는 쉬운 시를 쓰자는 게 말하자면 저의 시론이다. 어렵고 가난했던 추억, 그리운 추억으로 남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주고 싶고 잊혀져 가는 것을 남겨주고 싶다. 그래서 제 시에는 풍습이나 언어, 사투리 등이 많이 나온다. 

-시집 ‘거울속 시계바늘’을 출간했던데

△지난해에 출간했다. 시도 어느 정도 모이고 해서 정리도 할 겸 출판을 했다. 2집도 낼 만큼 분량은 됐는데 2집은 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래도 공직이라는 현직에 있다 보니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2집은 내지 않고 있다. 

-거울 속 시계바늘은 무슨 뜻인가. 

△거울 속 시계바늘은 거꾸로 가지 않나. 제가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한 추억 속 이야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제목은 제가 직접 지은 게 아니고 여러 제목을 저의 카톡에 올려놓고 카톡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서 정한 것이다. 일종의 집단지성을 통해 만든 제목이다. 

-사천에 와서도 시를 자주 쓰나

△웬 일인지 사천에 와서는 아직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고향이니 시를 더 많이 써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다. 퇴직 때까지는 그래도 몇 편은 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퇴직이 언제인가. 

△올 12월이다. 아마 사천경찰서장을 끝으로 퇴직하지 않을까 싶다. 

-퇴직해도 시를 계속 쓸 것인가. 

△그렇다. 

-퇴직이후 계획은 서 있나. 

△시골 와서 살고 싶다는 소망은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준비는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와 가족이 서울에 살고 있어서 어쨌든 서울을 떠나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서장의 여러 행동들을 보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해석이 있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정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향후 정치적 진로 생각해 본 적 없다

-현재 정치적 구도로 보면 사천, 하동, 남해 지역구에서는 자유한국당의 경우 후보들이 감옥엘 가거나 검찰 수사, 사고 등으로 상처를 받아 대안이 없는 상태인데 주 서장의 경우 사천에서 태어나 하동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사천과 하동에 연고가 있는 셈인데

△주민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으나 제가 뭐라고 먼저 말하기는 그렇다. 정치라는 것은 제가 하기 싫다고 안하는 것도 제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글 신현근 기자 사진 박청 기자
 

 

거울 속 시계바늘

 

돌아볼 여유없이 

앞만 보며 

쉽없이 달려와

 

지구밖 빙빙돌다 불시착한 위성처럼 

반백의 지친 모습으로

거울앞에 선다

 

단거리 선수처럼

긴초침 앞세우고

무얼찾아 그렇게 

바쁘게 서둘러 왔던가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고는 

오던길로 발길 돌리며

잃어버린 시간

찾아 나선다

 

시계바늘 궤적속에 새겨진 

희노애락

실타래같은 태엽 풀어보니

모두가 추억이고, 그리움이며, 설레임이다

 

깊은 바다 조개껍질 속

진주가 생겨나듯

그 순간 그 흔적 하나 하나

응고되어 시가 되고 

그 향기

천리만리 퍼진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