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나를 음악으로 이끌어준 곳
나는 들국화의 '세션' 기타리스트
절창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
핑크 플로이드는 우리 음악의 바탕

아직 여름이 덜 물러간 9월 중순. 서울 지하철 홍제역 3번 출구를 돌아 나와 그대로 200여 미터를 걸었다. 따뜻한 오후 햇살이 주택과 상가들을 비추고, 저 안쪽에 눈에 띄는 건물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디지털 서울 문화예술대학교(SCAU). 바로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 기타리스트 정현철씨가 근무하는 곳이다. 정씨는 이곳에서 기타 전공생 실기 수업을 맡아 강사로 일하고 있다.

정씨는 올해로 지천명이다. 그는 사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고성에서 살다 이후 봉원초등학교 재학 때부터 줄곧 진주에서 자랐다. 학교장 자리까지 지낸 그의 부친은 정년퇴직을 한 달 여 앞두고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정씨는 동명중학교를 졸업했고 다니던 동명고등학교는 2학년 때 음악에 뜻을 두며 자퇴했다. 이는 동명이인인 정현철(뮤지션 서태지의 본명)과 자퇴 시기, 자퇴 사유에서 겹쳐 따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정씨는 20대 때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하지 않겠냐’라는 친형의 권유로 중퇴로 남을 뻔한 고등학교 졸업장을 검정고시를 통해 받았다.

 

디지털 서울 문화예술대학교 녹음실에서 한 컷
기타리스트 정현철. 디지털 서울 문화예술대학교 녹음실에서 한 컷.

- 어린 시절 진주는 어떤 곳이었나요?

꿈 같은 곳이었다고 해야 하나(웃음). 동네가 되게 좋았어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그럼에도 있어야 할 건 다 있었죠. 사람들도 한 다리 거치면 거의 아는 사이였는데 덕분에 음악 친구들도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냥 뜻 맞는 사람들끼리 밴드 한 번 해볼까, 그렇게 시작이 된 거죠.

- 음악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영향을 받은 뮤지션이라든지.

이번 앨범 수록곡 ‘기타맨’ 가사에도 나와 있듯 13살 때인가, 집에 형이 갖고 놀던 통기타가 있었어요. 그걸 우연히 퉁겼는데 순간 그 소리에 확 빠져버린 거죠. 그 뒤 코드가 적힌 가요 책들을 보며 기타를 조금씩 배우던 중 이글스(Eagles)의 ‘Hotel California’를 우연히 듣게 됐는데 아, 이게 또 신세계였던 거죠(웃음). 노래부터 마지막 기타 솔로까지 입으로 흥얼거리며 ‘아, 이런 음악, 이런 기타 연주도 있구나’ 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당시엔 교재나 음반 같은 것이 많이 없었어요. 아는 형 소개로 부산의 한 서점에서 일본 악보를 구할 수 있었던 정도였죠. 부산은 일본과 가까워 악보를 구할 수 있는 환경이었거든요. 아마 삼호출판사라는 곳에서 번역했을 거예요. 부산에는 ‘빽판(80년대 한국에서 팔던 불법복제 레코드판의 통칭:편집자주)’ 파는 곳도 많았는데, 일주일에 한 번 한 보따리씩 사와서 기쁜 마음으로 보고 듣고 그랬죠.

- 과거 진주의 음악 씬(scene)은 어땠나요?

씬이랄 것도 없었어요. 85~6년 당시엔 대형 가수들도 공연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빌려 공연을 했어요. 공연할 만한 장소가 당시엔 흔하지 않았거든요. TV에 나오던 송골매 같은 밴드도 주 활동 무대는 나이트클럽이었으니까요. 80년대 후반까지는 그랬어요. 딱히 무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없었던 때니까요. 때문에 진주에서 음악을 하던 저는 서울 다음이었던 부산에서 주로 일거리를 찾았습니다. 서울 낙원상가처럼 서면 쪽에 악기상들이 쭉 있었는데 거기에서 ‘스페어’라고 하는, 멤버가 빌 때 하루 이틀 가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노리곤 했죠. 거기에서 인정을 받으면 팀에 소속이 되거나 다른 팀을 소개 받는 구조였어요.

- 그러다 서울로 가신 건가요?

네. 처음 서울에 가서 진주 고향선배인 박성호 형님(윤수일 밴드의 기타리스트) 집에서 몇 달 지내다 밴드 무당 출신의 지해룡 형님이 결성한 락코리아라는 팀에 김선중(정현철과 같은 진주 출신 드러머로 현재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약 중이다:편집자주)과 같이 들어갔어요. 물론 공연만 하다 보니 수입은 전혀 없었죠. 그래도 20살 시절이라 배 곯아가면서도 ‘락커 정신’으로 버티며 연습만 했었어요. 하지만 그 밴드는 성공하지 못했고 전 입대를 하게 됩니다. 제대 후엔 다시 진주 클럽들에서 연주하다 서울에서 알게 된 형의 부름을 받아 대구로 갔어요. 지붕위의 남자라는 팀을 결성해 활동했는데 앨범까지 냈지만 역시 돈을 벌 수 있는 밴드는 아니었죠(웃음).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이제 생계를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 때부터 여태껏 쭉 세션맨으로 활동해왔어요.

- 이제 락타 프로젝트 밴드(ROCK-TA PROJECT BAND)의 새 앨범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미니앨범 발매 이후 4년 만 복귀인데요. 지난 앨범도 그랬지만 이번 앨범 역시 양질의 내용물에 비해 홍보가 좀 부족해 보이는데 어떤가요.

저희가 특정 기획사에 소속된 밴드가 아니어서 모든 걸 자체로 했어요. 또 멤버들 생각이 천천히, 느긋하게 온라인 쪽으로 조금씩 해보자는 쪽이었구요. 인위적인 홍보보단 음악이 진정성 있게 들려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 만족하겠다는, 그 정도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락타 프로젝트 밴드는 부활의 드러머였던 故 김성태씨, 신촌블루스의 세션 베이시스트인 이정민씨와 함께 만든 밴드였습니다. 지금은 다르죠. 베이시스트 이경남, 드러머 송인군씨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멤버들 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특히 이경남씨는 캐나다 록밴드 러시(Rush)를 표방했다는 ‘상놈’ 등 송라이팅과 편곡에도 꽤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베이스 치는 친구는 워낙 세션을 많이 하는 친구여서 일찍부터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한영애 누나와 이은미씨 팀에서도 오래 했죠. 형 동생 하는 사이이고 서로를 흠모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봤어요.

- 두 분이 함께 연주한 적이 있는 건가요?

전인권 밴드에서였나, 한 번인가 이경남씨가 베이스를 연주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뒤 제가 락타 프로젝트 밴드 미니앨범을 줬는데 故 주찬권 형님 장례식장에서 만나 요즘 멤버를 새로 구하고 있다 말하니까 이 친구가 자기가 기꺼이 베이스를 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합류하게 됐고, 드럼 치는 송인군씨는 소개를 받았어요. 동년배 드러머들은 다들 바쁘고 각자 하는 일도 있어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좀 젊은 친구를 찾던 중 소개를 받았는데 이 친구가 우리 미니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똑같이 연주하더라구요. 그래서 너무 마음에 들어 바로 영입했죠.

 

락타 프로젝트 밴드(ROCK-TA PROJECT BAND).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현철(기타/보컬), 이경남(베이스), 송인군(드럼) 
락타 프로젝트 밴드(ROCK-TA PROJECT BAND).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정현철(기타/보컬), 이경남(베이스), 송인군(드럼) 

- 세간에서 정현철님을 소개할 때는 ‘들국화의 기타리스트’라는 타이틀을 가장 자주 인용합니다. 어떤 기분인가요?

저는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는 편인데요. 들국화 ‘세션’ 기타리스트였구요(웃음). 당연히 제가 들국화의 멤버가 될 수는 없죠. 그 팀의 오리지널리티는 워낙 견고한 이미지랄까, 그런 각인된 게 있어서 들국화 팬클럽 분들이나 공연을 보시는 분들은 ‘아, 그냥 있을 사람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들 해주셔요.

- 지난 미니앨범에선 강산에, 정경화, 장재원 같은 사람들을 게스트 보컬로 썼는데 이번에는 모든 곡들을 스스로 부르셨습니다. 듣는 사람에 따라선 다소 심심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친절한 마음씨의 여인’ 같은 곡은 강산에씨가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말이죠.

미니앨범 경우엔 멤버 중 한 사람이 고인이 되어서 활동이라는 걸 전혀 생각할 수 없었어요. 드럼 녹음을 끝내고 갑자기 그렇게 됐는데, 간암이었어요. 그런 사정을 아는 산에 형, 경화 누나, 황수권(건반), 민재현(베이스)씨 등이 도와주셨죠. 때문에 공연을 한다면 그때마다 피처링 보컬들을 불러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죠. 물론 보컬을 영입할 생각도 해봤는데 우리가 만든 곡을 100퍼센트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음도 뜻도 맞는 사람이 없을 것 같더라구요. 우리에겐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사실 절창만이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에 저는 굉장히 불만이 많습니다. 덤덤하고 불안한 듯한 목소리이지만 노래라는 건 이렇게 부를 수도 있는 거다, 라고 저희는 말하고 싶은 것이구요. 우리가 꼭 노래를 잘 해서가 아니라 씩씩하게 우리가 부르자, 그렇게 된 거예요. 물론 앞으로 연습도 많이 하고 더 잘 해야겠죠(웃음).

- 록이라는 장르가 이미 블루스에서 온 것이지만 정현철님은 확실히 블루스가 가미된 록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난 앨범의 ‘빛바랜 사진’ 같은 곡. 이번 앨범은 바로 그 곡의 연장선 같은 느낌을 주는데요.

제 음악엔 연주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같은 음악이 바탕에 깔려 있어요. 이것은 이경남씨와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친절한 마음씨의 여인’ 같은 경우, 그냥 재미있자고 만든 곡인데 제가 음울하게 편곡을 끌어낸 뒤 계속 그런 느낌으로 가는 것 같아요. 우리의 다음 싱글이나 앨범도 프로그레시브 록 느낌에서 쉬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 현철님의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을 좀 살펴봤습니다.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닐 영(Neil Young)은 그렇다 쳐도 샤데이(Sade),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é), 심지어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Czech Philharmonic Orchestra)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들으시는 것 같더라구요. 이 모든 음악들로부터 조금씩 영감을 얻는 건가요?

하고 싶다기보다 일단 제가 하지 않는 음악들이고, 기본적으로 저는 음악을 편식하지 않고 들으려 합니다. 제 자양분이 한 쪽으로 치우쳐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최근에도 제가 몰랐던 밴드, 음악이 너무 많아서 아주 즐겁게 듣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딥플로우(Deepflow)의 ‘작두’라는 곡을 들었는데 국악 같은 샘플링에 가사 내용도 그렇고 아주 좋았어요. 욕심에는 다음 앨범에서 래퍼 한 분과 곡을 만들어보는 것도 어떨까 싶어요.

 

락타 프로젝트 밴드 1집 [This World] 재킷 사진
락타 프로젝트 밴드 1집 [This World] 재킷 사진. 이들 음악은 핑크 플로이드 풍 프로그레시브 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 기타리스트로선 로이 부캐넌(Roy Buchanan)과 프랭크 자파(Frank Zappa)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리스트에 개리 무어(Gary Moore)의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 있는 걸로 봐선 부캐넌 쪽을 좀 더 편애하시는 것 같기도 한데요(웃음).

로이 부캐넌은 제가 블루스 기타에 처음 꽂히게 해준 사람이에요. '황인용의 영팝스'에서 ‘Wayfaring Pilgrim’을 처음 듣고 ‘와, 이건 뭐야? 이런 기타 소리가 다 있네’ 그랬거든요. 첫 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분 기타 소리는 아주 개성이 강해서 굳이 크레디트를 안 봐도 맞힐 수 있을 정도죠. 물론 프로필 뮤직에 올린 것 외에도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야 무지 많습니다(웃음).

- 분명 이번 앨범은 핑크 플로이드를 많이 참고한 것 같습니다. 특히 첫 곡 ‘이 세상’에서 다음 곡 ‘기억해’로 이어질 때, 그리고 ‘별’과 ‘U Know’ ‘I Know’ 같은 곡들이 가진 아스라한 느낌은 「Division Bell」의 첫 곡 ‘Cluster One’과 ‘What Do You Want from Me’를 떠올리게 합니다. 현철님의 느리고 깊이 있는 연주를 추구하는 모습도 물론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를 연상시키구요.

딱히 의식한 것은 아닌데 워낙 들어온 게 그런 음악이었어요. 모방이라면 모방이라 할 수도 있고, 좋은 건 따라하게 마련이니까요. 핑크 플로이드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요.

- 그리고 ‘이 세상’은 초반 내레이션으로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데요. 기득권자들 또는 어른들의 욕심에 화가 나 있는 것도 같습니다. 뒤에 나오는 ‘상놈'은 그 절정인 듯 보이구요.

‘기억해’를 먼저 쓰고 1년이 지났나,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그러다 세월호 사건도 함께 떠올랐어요. 특정 사건에만 얽매이지 않도록 에둘러 쓰긴 했는데 듣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린 언젠가 다 죽을 목숨들인데 그렇게 욕심 부리며 아등바등 살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 제가 좋아하는 ‘기억해’의 기타 솔로에는 따로 심혈을 기울이신 듯합니다. 멜로디가 서정적이고 또한 슬픈데요.

집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면서 이리저리 바꿔 해본 겁니다. 이경남씨에게 첫 솔로를 바꾸어 보냈더니 아닌 것 같다고, 7~8번 퇴짜를 맞았어요(웃음). 첫 녹음 때 솔로가 제일 좋다고 하더군요. 후주도 최대한 들어낸다고 들어냈는데도 여전히 아쉬워요. 완벽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다 하고 나면 늘 아쉽죠.

 

녹음실에서 연습 중인 정현철씨
녹음실에서 연습 중인 정현철씨

- ‘별’ 같은 곡은 현철님 본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막걸리 한 잔 마시며 큐베이스(Cubase)로 작업하던 중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니 정말 그립더라구요. ‘별’은 한 자리에서 미디로 다 작업한 거예요. 가사는 원래 있었던 거라 하루 만에 끝냈구요. 멤버들이 어쿠스틱 악기보다 미디 버전이 더 낫다고 해서 그대로 간 것이고, 앞부분 기타 연주만 따로 붙여 완성한 겁니다.

- 이번 앨범은 기타리스트 정현철의 야심작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혹시 솔로 앨범도 노리고 계시는지.

저는 솔로보다 밴드 기타에 충실하고 싶어요. 기타리스트로서 욕심은 없습니다. 기타로 솔로 앨범을 낼만한 실력도 안 되구요. 밴드 음악이 저에겐 최고입니다.

- 마지막으로 「경남진주신문」 독자들과 음악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진주는 제가 자란 곳이고 제 음악 생활의 시작이 되어준 곳입니다. 저를 프로의 길로 이끌어준 박성호 형님을 비롯 옛날 나리 악기사, 지금 태진미디어의 하수규 사장님, 그 외 같이 음악 하던 형들. 진주의 그 고마운 분들 덕분에 서울에서 프로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진주는 제게 고맙고도 자랑스러운 곳이죠. 그런 곳에서 창간되는 「경남진주신문」 첫 호에 제 인터뷰가 실리게 되어 너무너무 영광이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진주의 좋은 일, 좋은 분들 소식 많이 전해주시구요, 번창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제공=정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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