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진주옥봉성당 신부부름에 성심원행
피카소작품으로유명한 스페인게르니카출신

편견 NO! ”한센인들은 살아있는 그리스도”

3년 전까지 고인된 환자들 손수 염 해
한센병, 과거겪은 것일뿐 옮는병 아냐

유의배(72, 스페인 이름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 무려 37년간 산청 성심원에서 한센인들을 돌봐 온 사람이다. 유 신부의 고향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다. 사람들에겐 피카소의 작품으로 유명한 곳이다.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나치의 무차별 폭격을 당한 곳으로 당시 유 신부의 조부와 부친, 모친이 모두 이 사건을 겪었다. 빵을 만들어 판 부모님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사제였던 삼촌의 모습에 매력을 느껴 신부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유 신부는 16살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바스크 지방 아란차수신학대학을 졸업했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한국에 오기 전 볼리비아 해발 4천미터 티티카카라는 호수 근처에서 인디언들과 함께 살며 2년간 선교활동을 한 그는 떠날 시기가 되어 한국행 비자를 만들려 했지만 베트남 전쟁 관계로 발급까지 무려 6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는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대리전쟁의 희생양으로 중국, 한국이 ‘베트남 다음’으로 거론되었던,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 불거지던 시대였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한국에 유 신부는 사제로서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유 신부는 1976년 1월27일 비로소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에 온 유 신부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있는 명도원에서 2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그 뒤 진주, 주문진, 제주도를 2년 반 동안 두루 거쳤다. 경상대학병원 인근 한주아파트 양로원에서 1년 여를 머문 그는 이어 진주 옥봉성당에 있던 꼬스탄조 쥬뽀니(Costanzo Giupponi) 신부의 부름에 응해 1980년 산청 성심원으로 오게 된다. 그는 산청으로 오기 전 잠시 머물렀던 진주를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유의배 신부는 산청 성심원에 와 고향 스페인에서 봤던 간호사들의 한센인들에 대한 헌신을 다시 생각했다. 그 생각은 이후 유 신부 삶의 원칙이 된다. 성심원엔 한때 500명 넘는 한센인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중증 환자, 지체장애인들 포함 140~150명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할 사람이 없어 직접 했다는 망자 염은 법적 문제로 지난 8월부터 인근 장례식장에 맡기고 있다.

유신부는 한센인들을 향한 세상의 편견을 터무니 없는 소리라며 잘라 말한다. 되레 그는 한센인들을 살아 있는 그리스도로 보며 그들을 신앙의 눈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보듬어 달라 세상에 호소한다. 한센인들 역시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라는 얘기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어릴 적 꿈이었던 유의배 신부는 전국 9개인 한센인 민간복지시설 가운데 천주교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고 있는 성심원에서 올해로 37년째 살고 있다. 제3회 이태석봉사상, 대한적십자사 창립 111주년 '적십자 인도장 금장’을 받았다.

인애원 성당에 선 유의배 신부. 유의배 신부는 사시사철 맨발이다. 검은 수도복 허리춤에 있는 세 개 매듭은 청빈과 순결, 순명을 상징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허리띠다.
인애원 성당에 선 유의배 신부. 유의배 신부는 사시사철 맨발이다. 검은 수도복 허리춤에 있는 세 개 매듭은 청빈과 순결, 순명을 상징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허리띠다.

◇내 꿈은 여전히 오케스트라 지휘자

-태어난 곳은 어디인가.

△피카소 그림으로도 유명한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일 나치가 스페인 파시스트 정권인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무차별 폭격을 가한 곳이다. 당시 고향에 살던 7천명 사람들 가운데 3천여명이 죽었다고 들었다. 폭격의 참상은 오래 갔다.

-가족들은 무사했나.

△비록 합판이긴 했지만 우리에겐 집이 있었고 초를 만드는 공장도 있었다. 하지만 폭격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아버지는 군대에 있었다. 게르니카 근처엔 시골 마을이 많은데 월요일에는 장이 섰다. 나치의 폭격은 바로 그 소, 돼지, 밀, 옥수수를 내다 팔던 장날 이뤄졌다. 어머니는 그때 가게 밑 창고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동생들과 연락은 주고 받나.

△(본인 휴대폰을 보여주며)요즘엔 거의 매일 휴대폰으로 사진과 메일이 온다. 남동생이 사진에 관심이 많다. 전화도 수시로 하고. 과거 80년대엔 스페인에 전화 한 통 걸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다. 마을에 전화가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싶어 당시 진주 봉곡동에 있던 전화국에 갔지만 거기서도 2시간은 기다려야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동생들은 어떤 일을 하나.

△여동생은 복지관 간호사다. 남동생은 건축 회사를 다녔는데 퇴직했다. 남동생의 부인은 교장선생님까지 지내고 퇴직한 상태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대하기가 편했는데 두 분 다 돌아가신 지금은 동생들 만나기가 썩 편하진 않다.

-부모님은 언제 돌아가신 건가.

△어머니는 1992년 3월13일에, 아버지는 2002년 3월13일에 돌아가셨다. 두 분이 같은 날짜에 세상을 등지신 거다. 아버지는 생전에 엄격한 생활을 했다. 집과 공장만 오갔고 술, 담배, 매운 것을 멀리 했다. 당신이 즐겨 드신 건 올리브 기름을 바른 하얀 생선이었다. 아버지는 93세까지 장수 하셨다. 하지만 늘 같은 시간, 같은 음식을 먹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고생했다.

산청 성심원 전경. 1976년 1월27일 한국 땅을 밟은 유의배 신부는 주문진, 제주도, 진주를 거쳐 1980년 성심원으로 부임해 37년간 한센인들과 함께 지내왔다.
산청 성심원 전경. 1976년 1월27일 한국 땅을 밟은 유의배 신부는 주문진, 제주도, 진주를 거쳐 1980년 성심원으로 부임해 37년간 한센인들과 함께 지내왔다.

-임종은 지켜드렸는지.

△안타깝게도 두 분 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나마 장례 미사를 내가 직접 인도해 좀 나았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심장이 안 좋았는데 상태가 심각해졌다는 연락을 받고 교구에서 준 5개월 휴가로 가 뵐 수 있었다. 상태가 좋아진 걸 확인하고 한국으로 왔는데 1주일 뒤 돌아가셨단 소식을 들었다. 들은 바로는 내가 한국으로 떠난 뒤 어머니는 '버림받았다'며 무척 슬퍼하셨다고 한다. 가슴이 너무 아파 성심원 사람들과 함께 울었다.

-신부를 꿈 꾼 계기가 삼촌이었다고 들었다.

△아버지에겐 형제 둘이 있었다. 그 중 삼촌 한 명이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였다. 하루는 신부가 되고 휴가를 나온 삼촌을 보았는데 그 분위기가 괜히 좋았다. 무언지 모를, 매력도 잘 몰랐지만 아무튼 끌렸다. 이후 16살 때 들어간 프란치스코 수도회 바스크 지방 아란차수신학대학은 부모님께서 인도해준 것이다. 거길 졸업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선택에 후회는 없었나.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로도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24살, 길을 결정해야 할 시기에 나와 함께 시작했던 70명 중 5명만 수도자로서 길을 택했다. 당시 우린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우리는 바보인가’라고 말했다(웃음). 그리고 몇 년 전 5명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 우리 중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신부님의 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라고 알고 있다.

△꿈은 지금도 그렇다. 나는 오케스트라 음악이 들리면 다른 일을 못 한다. 1960년이었나. 고등학교 때 처음 TV를 봤는데 시골 성당에서였다. 그때 처음으로 오케스트라를 본 게 지금까지 왔다. 성가대 합창단도 좋아하는데 얼마 전에도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 공연을 봤다. 환상적이었다.

성심원 만남의 방 보눔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 중인 유의배 신부. 그는 한국말로 인터뷰 하는 내내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성심원 만남의 방 보눔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 중인 유의배 신부. 그는 한국말로 인터뷰 하는 내내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진주는 내 고향이다”

-한국에 오기 전 볼리비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볼리비아 해발 4천미터 티티카카라는 호수 근처에서 인디언들과 함께 살며 2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그곳은 진짜 가난한 곳이었다. 떠날 땐 그곳 사람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울기도 했다.

-처음엔 파라과이에 가고 싶어했다고.

△맞다. 파라과이에 정말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을 가면 동아시아를 가볼 수 있고, 영어와 한국어도 배울 수 있었다. 더 큰 세상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한국행 비자를 만들려고 했는데 6개월을 기다렸다. 주위에서 한국엘 가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도 위험하리란 이유에서였다.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대리전쟁의 희생양으로 베트남 다음 중국, 중국 다음 한국이 거론되는 시대였다. 이른바 도미노 이론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한국에 나는 사제로서 반드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76년 1월27일 한국 땅을 밟게 된다.

△처음 왔을 때 깜짝 놀랐다. 전쟁을 겪은 나라여서 볼리비아처럼 어렵게 사는 나라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서울은 마치 뉴욕 같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불편한 건 없었나?

△한국말 외에는 없었다(웃음). 음식도 다 맛있었고.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던 것 같다.

-서울엔 얼마나 머물렀나.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있는 명도원에서 2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그 뒤 진주, 주문진, 제주도를 2년 반 거쳤다. 우리 선교사들은 보통 이탈리아가 진주, 남해, 거제, 산청을, 캐나다는 대전, 멕시코는 전주, 네덜란드는 서울, 스페인은 수원, 강릉 등지를 맡았다.

-진주 어디였나.

△경상대학병원 인근 한주아파트 양로원에서 1년 여 있었다.

-그리고 간 곳이 산청 성심원?

△그렇다. 진주 옥봉성당에 계셨던 꼬스탄조 쥬뽀니 신부가 나를 불러 1980년 성심원으로 오게됐다. 내 나이 27살 때 일이다.

-진주는 신부님에게 어떤 곳인가.

△어딜 가서도 진주를 내 고향이라고 말한다. 일단 강이 있는 도시라 아름답고, 오르막도 많이 없어 좋다. 나는 대도시는 싫다. 작은 도시여서 진주를 좋아한다. 진주에서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나는데,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칠암동에서 도동 수녀원까지 미사 보러 갈 일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도로가 비포장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그만 펑크가 난 거다(웃음). 결국 자전거를 들고 대나무밭을 지나 도동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유 신부가 지난 10월 들어선 ‘성심원 역사관’에서 성심원 주요연혁을 기자에게 자세히 소개해주고 있다.
유 신부가 지난 10월 들어선 ‘성심원 역사관’에서 성심원 주요연혁을 기자에게 자세히 소개해주고 있다.

◇한센인들 곁 “응당 내가 있어야 할 곳”

-산청의 첫 느낌은 어땠나.

△좋았지만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왔는데 정말 산 밖에 없었다(웃음). 바람도 차고. 당시엔 성당과 초가집들 뿐인, 완전한 시골 마을이었다.

-한센인 이야기를 좀 해보자. 먼저 이곳 성심원 구조를 설명해줄 수 있나.

△부부세대가 사는 가정사 4개동과 독신 남자 노인들이 사는 독신사 1개동, 그리고 중증장애노인들이 이용하는 전문 요양원과 대성당, 수도원과 수녀원, 납골묘원이 있다. 또 직원기숙사와 봉사자/방문자숙소, 1회 최대 150명이 쓸 수 있는 교육관도 있다. 여기에 지난 10월 인애원을 리모델링 하면서 성심원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작은 역사관도 만들었다.

-처음 성심원이 세워질 때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 같다.

진주에 살던 한센인 25명이 정착촌을 만들려 하니 마을 주민들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와 내쫓았던 일이 있다.

-과거에도 한센인을 대해본 적이 있는지.

△스페인에도 여기 비슷한 나환자 병원이 있다. 파라과이 한센인 마을에 갈 마음으로 머물렀는데, 당시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간호사들을 보고 나도 한센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와서 그때 마음이 되살아났다. 유럽, 아프리카에선 피부 한센병이 대부분인데 반해 아시아 쪽은 신경 쪽이라는 게 다르다. 처음 한센인들을 봤을 땐 조금 놀랐지만 속으론 ‘이거다’ 싶었다. 그들 곁이 응당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 여겼다.

한 남성 한센인 환자와 장난 중인 유의배 신부. 그는 ‘그러다 한센인 되면 어떡해요’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왜? 유명한 사람 되고 좋지’ 답한다고 말했다.
한 남성 한센인 환자와 장난 중인 유의배 신부. 그는 ‘그러다 한센인 되면 어떡해요’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왜? 유명한 사람 되고 좋지’ 답한다고 말했다. 사진제공=성심원

-성심원엔 한때 500명 넘는 한센인이 산 것으로 안다.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 중증 환자, 지체장애인들 포함해 140~150명 사이에 머물고 있다.

-지금도 고인들 염을 직접 하나.

△마을 노인들과 봉사자들 어깨 너머로 배워 3년 전까진 했지만 지금은 못한다. 옛날엔 책임자가 의사여서 가능했다. 지금은 염 행위를 할 수 없다. 지난 8월부터 고인들 염은 근처 장례식장에서 치러지고 있다. 근래에도 세 분이 돌아가셨다.

-고향이 그립진 않은가.

△항상 생각난다. 언젠가 월드컵 때 한국 대 스페인 경기를 혼자 본 적이 있는데, 내가 여전히 스페인 편인 걸 깨달았다(웃음).

-한국어를 더 공부할 생각은 없나.

△발전이 없어 더 공부할 생각은 없다(웃음). 대신 항상 한글 책을 읽고 사투리도 웬만큼은 다 알아듣는다. 한글 때문에 생활하는데 불편함 같은 건 없다.

전문요양팀(중증어르신생활공간) 미사집전 모습. 유 신부는 16살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바스크 지방 아란차수신학대학을 졸업, 사제서품을 받았다.
전문요양팀(중증어르신생활공간) 미사집전 모습. 유 신부는 16살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바스크 지방 아란차수신학대학을 졸업, 사제서품을 받았다. 사진제공=성심원

-한센인을 향한 사랑에 비추어 세간은 신부님을 ‘성인(聖人)’으로까지 칭송한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거다.

-여전히 한센인에게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한센인들도 모두 우리의 형제들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신앙의 눈으로 보라. 사랑으로 보라. 그러면 무서운 것들이 죄다 없어진다. ‘그러다 한센인 되면 어떡해요’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왜? 유명한 사람 되고 좋지’라고 답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곳 사람들에게 한센균 같은 건 전혀 없다. 옛날이라 치료를 제대로 못 받은 것이고, 바깥으로만 남아 있는 거다. 만져도 아무 이상 없다. 그나마 다행인건 봉사 오는 학생들이 편견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환자들과 잘 놀고 말도 잘 들어준다. 단풍은 바깥에서 보면 아름답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잎이 시들어가는 일이다. 성심원은 그 반대다. 겉은 아름답지 않아 보여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만큼 아름다울 수가 없다.

글=김성대 기자 사진=조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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