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진주시 진성면에서 3녀1남의 막내로 태어나
KBS공채에서 523대 1의 경쟁 뚫고 아나운서 선발돼

비영리 ‘좋은이웃컴퍼니’ 만들어 후배 시각장애인 지원
내년 1월 15일 서울 서초구에서 평창 성화봉송 참여

2011년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KBS에서 앵커로 채용돼 세간의 화제가 됐던 이창훈 아나운서는 진주출신이다. 진주시 진성면이 그의 고향이다. 1985년에 이곳에서 아버지 이동률, 어머니 이상녀 여사 아들로 위로 누나 3명에 이어 막내로 태어났다. 아들 낳기 위해 딸을 둘이나 더 낳고 태어난 귀한 아들이다. 딸만 내리 3명을 낳으니 아들을 꼭 낳으라는 집안의 성화에 당시로는 드물게 4명의 아이를 가지게 됐다. 이창훈 아나운서는 그렇게 어렵게 태어난 귀한 아들이다. 

이렇게 귀하게 태어난 아이였으나 하늘이 시기했는지 생후 7개월째 뇌수막염을 앓아서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뇌수막염으로 눈의 망막필름이 타 버려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뇌수막염은 지금으로는 그리 위험한 병이 아니다. 그런데 당시 진주에는 소아과가 두 군데 밖에 없었다. 감기인줄 알고 쉽게 생각했는데 치료시기를 놓쳐 결국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본인 이창훈 아나운서는 이런 기억이 없다. 자신은 보았다는 기억이 없다.  

귀하기 귀한 아들이 한 살도 되기 전에 병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니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아버지 이동률 선생은 삶을 놓아버리고 폐인이 되어 갔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진성의 회사에 일하러 다니고 있지만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살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한 법. 어머니 이상녀 원장은 아직도 진성IC 3거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다. 창훈이가 태어날 때 하고 있던 미용실을 40년 가까이 아직도 운영하고 있다. 창훈이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봐 미용실을 놓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이창훈 아나운서의 누나 3명은 모두 잘 돼 있다. 큰 누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고 아들인줄 알고 낳은 작은 누나는 서울에서 세종대학에서 수학 교수를 하고 있다. 낳지 않으려고 했으나 아들이라고 생각해 낳은 세째 누나는 건축설계사이다. 최근 결혼하여 잠시 일을 놓고 있다. 원래 머리가 다들 좋아서 자기 앞가림을 다 잘 한다고 한다. 이창훈 아나운서도 생후 7개월에 찾아온 불행만 없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이창훈 아나운서는 생후 7개월에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정상인이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한다. 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보지 못하는 게 그리 불행하지 않다는 것. 이창훈 아나운서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밝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이창훈 아나운서는 2012년 4월 시각장애인으로는 첫 방송인 ‘이창훈의 생활뉴스’를 끝낸 후 프리랜스로 활동하고 있다. ‘이창훈의 행복뉴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고 ‘창훈선배 소소한 노하우’라는 TV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또 좋은 이웃컴퍼니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시각장애인 문화예술인들을 발굴하고 그들이 넓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창훈 아나운서는 시각장애인 후배들이 방송인의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어렵지만 방송 일을 계속하고 있다.  

고향 진주에 대해서는 포근하면서도 낯선 느낌이라고 했다. 어릴 때 진주를 떠나서 진주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고 친구가 없어서 진주에 와도 집에 머무는 일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어서 낯설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진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고 또 진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진주 출신 이창훈(33)아나운서는 2011년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KBS 앵커로 선발돼 ‘이창훈의 생활뉴스’를 1년5개월 동안 진행됐다. 사진=박청기자
진주 출신 이창훈(33)아나운서는 2011년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KBS 앵커로 선발돼 ‘이창훈의 생활뉴스’를 1년5개월 동안 진행됐다. 사진=박청기자

 

◇프리랜스로 방송, 공연 활동 지속하고 있어

-현재 하고 있는 일은.

△KBS와 계약이 끝난 뒤에는 프리랜스로 활동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KBS 3라디오에서 월요일 마다 ‘이창훈의 행복뉴스’코너를 진행하고 있고 KTV에서 ‘창훈선배 소소한 노하우’도 진행하고 있다. 

-‘창훈선배 소소한 노하우’는 어떤 성격의 프로인가.

△일주일에 한번 방송하는데 제가 장애인으로서는 그래도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살아오면서 익힌 노하우등을 장애인들에게 소개하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그 외에는?

△팟캐스트 활동을 하고 있다. 제가 야구를 좋아해서 ‘주간 야구외’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 주간에 있었던 야구와 관련된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시각장애인인데 야구를 좋아한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된다. 

△하하하. 2012년도에 제가 야구 시구를 한 적도 있다. LG와 삼성의 경기였는데 제가 야구를 좋아한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 시구요청이 와서 하게 됐다. 시각장애인도 얼마든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물론 경기장에 가서 관람할 수는 없지만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충분히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 

-어느팀 팬인가.

△LG트윈스 팬이다. 

-올해 LG성적이 어떤가.

△6위를 했다. 

-좋아하는 선수는. 

△지금은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상훈 선수와 이병규 선수를 좋아한다. 

 

이창훈 아나운서가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제공=KBS
이창훈 아나운서가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제공=KBS

 

◇야구를 좋아해 팟캐스트에서 주간 야구외’ 진행하고 있어 

-KBS아나운서로 채용된 게 언제인가

△2011년이다. 정규직으로 채용된 건 아니고 당시 계약직으로 채용됐다. KBS도 아마 시험적으로 시각장애인 아나운서 제도를 운영했던 것 같다. 

-당시 어떻게 해서 채용되었나.

△KBS에서 공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해서 응시를 하게 됐다. 합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경쟁률이 심했다고 들었다.

△523대 1이 경쟁률이었다. 

-경쟁률이 이렇게 높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아마 처음 있는 일이니까 시각장애인들이 꼭 합격해야 겠다, 는 생각보다는 일단 한번 원서를 넣어봤던 것 같다. 

-합격통지를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당시 과학부 부장이셨던 임흥순 부장님이 합격통지를 해 주셨는데 저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합격을 할 수 있나. 말도 안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학교 다닐 때 아나운서에 대한 꿈이 있었나. 

△그런 건 아니었다. 원래 방송이나 아나운서 등에 대한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합격하고 나서 지옥훈련을 했다. 

 

◇KBS아나운서 합격 후 3개월간 실무 지옥훈련 거쳐 

-주로 어떤 훈련이었나 

△아나운서는 두 가지 능력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보도 기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기사에 대한 이해도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오랜 기자생활을 통해 터득되는 것이다. 그런데 단기간에 기사에 대한 이해도를 가져야 하니 힘들었다. 보도국 각 부서를 3개월간 돌아다니면서 뉴스에 대한 이해도를 쌓아나갔다. 

-또 다른 능력은 무엇인가.

△뉴스의 전달력이다. 뉴스를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해야 한다. 저는 말이 좀 빠르고 목소리가 느끼한 톤이었다. 저의 이런 언어습관으로는 기사의 이해도를 높일 수 없고 전달이 어렵다. 그래서 이것을 고치기 위해 지옥훈련을 하게 됐다. 

-처음 맡은 프로그램이 무엇인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2011년 11월7일 당시 가을개편으로 처음 시작한 ‘이창훈의 생활뉴스’였다. 그렇게 심각한 뉴스를 전달하는 것은 아니고 물가, 여가, 교통 등 생활과 관련된 소프트한 뉴스를 전하는 것이었다. 당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인기몰이 중이어서 유튜브 조회수가 몇 건이라는 것 등이 주요뉴스였다. 1년 5개월 동안 하고 프로그램 개편으로 중단됐다. 

-당시 기억나는 일들은. 

△2011년 12월인데 분장을 하고 방송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속보가 떴다. ‘김정일 사망’이라는 대형 사건이 발생해 뉴스가 속보체제로 전환됐다. 그래서 저는 방송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특보체제로 뉴스가 전환되면 기존 방송은 중단되나.

△그렇다. 특히 태풍이 올라오면 뉴스가 전반적으로 특보체제로 전환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뉴스는 모두 중단된다. 

-이 프로그램을 마치고 KBS를 떠났나.

△원래 저는 처음부터 계약직으로 시작한 것이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끝으로 KBS와는 계약이 끝났고 그 이후 프리랜스로 전환돼 KBS에서 계속 일했다. 

-어떤 프로그램이었나. 

△KBS가 운영하던 사랑의 가족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창훈의 마주보기’라는 코너를 담당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가 인터뷰한 인물이 110명이나 됐다. 사회각층의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안목을 많이 넓혔다. 

 

어머니 이상녀 원장과 이창훈 아나운서. 이창훈 아나운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비영리 단체인 ‘좋은이웃 컴퍼니’를 만들어 후배들을 발굴하고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어머니 이상녀 원장과 이창훈 아나운서. 이창훈 아나운서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비영리 단체인 ‘좋은이웃 컴퍼니’를 만들어 후배들을 발굴하고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이창훈의 마주보기’에서 나눔 실천 110명 인터뷰

-주로 어떤 사람들을 인터뷰했나. 

△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는데 산악인 엄홍길, 가수 윤하, 현숙씨 탈렌트 이상우, 개그맨 안선영, 농구선수 김주성씨 등을 인터뷰한 기억이 난다. 

-당시 활동으로 상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2011년에 올해를 빛낸 장애인문화예술인 상을 받았고 2013년에 대만에서 시상하는 국제생명사랑상을 받았다. 장애인으로는 국내에서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제가 상을 받을 일을 한 것은 아닌데 이런 상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한다. 

-시력을 잃은 것은 언제인가. 

△1985년 진주시 진성면에서 태어났다. 저는 태어날 때는 정상인이었다. 그런데 생후 7개월 되던 때 뇌수막염을 앓아 시력을 잃었다.

-그럼 시력을 잃지 않았던 때를 기억하나.

△생후 7개월 때이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 뇌수막염으로 망막의 필름이 타버려서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그래서 저는 조금의 빛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 불편하지 않나.

△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게 불편하지 않다. 보통 정상인들은 시각장애인들을 볼 때 많이 안타까워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시작장애인들은 실제로 보지 못하는 데 대해 그리 힘들게 생각하지 않는다. 

 

◇8살 때 진학위해 진주 떠나

 진주는 포근하면서도 낯선 곳

-진주는 언제 떠났나.

△8살 때 서울에 있는 ‘참빛맹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진주를 떠나게 됐다.

-참빛맹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시작장애인들을 위한 특수학교인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12년 과정이 있다. 저는 여기서 12년 동안 학교생활을 했다. 그리고 대학은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숭실대학으로 옮겨서 대학원을 마쳤다, 지금은 연세대학 언론홍보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아주 어릴 때 진주를 떠나 진주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겠다.

△그렇다. 진주는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고 친척들이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진주는 포근하면서도 낯선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근하면서도 낯선 곳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있어서 포근한 곳이지만 사실 진주에 가면 할 일이 없다. 친구가 없으니 집에만 머물 수 있을 뿐이지 다른사람과 공유하는 일들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주는 포근하면서도 낯선 곳이다. 

-진주에는 자주 오나.

△그렇지는 못하다. 제가 월드비젼 홍보대사여서 2013년인가 진주에서 학부모 대상으로 설명회를 했던 기억이 난다. 고향인 진주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패러글라이딩 등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하고 싶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가.

△우리나라에서 시각 장애인으로 첫 앵커가 됐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시각장애인인이 방송앵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도록 방송활동을 계속하고 싶다. 앵커뿐 아니라 예능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공연등도 하면서 시각장애인에 대한 틀을 깨고 싶다. 또 패러글라이딩 등 익스트림 스포츠도 해서 시각장애인 후배들의 모범이 되는 일들을 할 생각이다. 

-시각장애인이 패러글라이딩도 할 수 있나.

△보이는 게 없는데 무서울 게 뭐 있나.<웃음> 실제로 암벽등반을 하는 시각장애인도 있다. 

-평창올림픽 성화봉송 주자로 알고 있다.

△그렇다. 내년 1월 15일 서울 서초구 구간에서 성화봉송에 참여한다.  

-좋은이웃 컴퍼니는 무엇인가. 

△제가 만든 시각장애인 후배들을 돕는 비영리 단체이다. 

-주로 어떤일을 하나. 

△시각장애인 후배들 가운데 문화예술 분야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또 활동을 지원하는 그런 일을 한다. 

-지금 이 카페도 좋은이웃컴퍼니에서 운영하는 것인가. 

△그렇다. 공연을 위한 연습도 할 수 있고 또 카페운영을 통해 나오는 수익금은 공연등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한다.

 

어머니 이상녀 원장은 “아이를 갔다버리라. 앞도 못 보는데 학교는 뭐하러 보내느냐.”는 주변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서울의 참빛맹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숭실대학교대학원,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보내 오늘의 이창훈을 만들었다. 이상녀 원장은 아들에게 도움이 될까봐 지금도 진성IC 3거리에서 40년이나 미용실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어머니 이상녀 원장은 “아이를 갔다버리라. 앞도 못 보는데 학교는 뭐하러 보내느냐.”는 주변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서울의 참빛맹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숭실대학교대학원,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보내 오늘의 이창훈을 만들었다. 이상녀 원장은 아들에게 도움이 될까봐 지금도 진성IC 3거리에서 40년이나 미용실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이창훈 아나운서 어머니 이상녀 원장 인터뷰

“길에서 반려견을 보면 눈이 보인다. 개도 눈이 있는데 우리 아들은 왜..?.“

 

-창훈 씨가 어떻게 해서 시각장애인이 됐나. 

△태어난 지 7개월 째 되던 때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고 심하게 아팠다. 당시 진주에 소아과병원이 두 군데 있었는데 감기라고 해서 감기약을 먹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낫지를 않고 아이가 점점 더 괴로워해서 대학병원엘 다시 갔더니 서울의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갔더니 뇌수막염으로 판명이 났다. 그때는 이미 뇌수막염으로 인한 열로 눈의 망막필름이 다 타버려서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요즈음 정도의  의료기술이 발달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평생의 한이다. 

-형제가 몇인가.

△창훈이 위로 누나만 세 명이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가.

△딸을 둘 놓고 나서 세 번째도 아들을 놓으려고 낳았다. 그런데 또 딸이었다. 시댁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들을 놓으라는 시댁의 뜻에 의해 네 번째를 임신해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그만큼 창훈이는 귀한 아들이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인데 뇌수막염을 앓고 시력을 잃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것 같다.

△사는 게 아니었다. 창훈이 아버지는 진성에서 카센터를 하고 있었는데 아예 삶을 접어버렸었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바깥에도 나가지 않으면서 술로만 세월을 보냈다. 지금은 마음을 많이 잡고 진주골프장에 나가서 일을 한다. 저는 저라도 기운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하고 있던 미용실을 아직도 하고 있다. 제 미용실에 가면 아직도 창훈이 눈이 정상일 때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 사진을 없앨 수가 없다. 30년이 더 지난 일인데도 아직도 사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창훈이를 키우면서 어땠나.

△저희들이 사는 지역이 아무래도 농촌이다 보니 보수적인 생각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많다. 창훈이가 어릴 때 주변에서 “어디 갔다버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또 참빛 맹학교에 보내기 위해 서울로 유학을 보내는데 “앞도 못 보는데 공부시키면 뭐하냐”며 주변에서 반대도 많았다. 그래도 장애인일수록 큰데 가서 키워야 사람노릇하지 않겠나, 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기독교 재단인 한빛맹학교에 보내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장애인은 키워보지 않으면 그 마음을 모른다. 아들보다 내가 장애인이다. 안 키워본 사람은 모른다. 서울역을 지나는데 노숙인들이 있는데 눈이 먼저 보이더라. 저 사람들도 눈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사람을 보면 “개도 눈이 있는데...”하는 생각이 든다.  

-시력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나.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나. 창훈이는 괜찮다고 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다. 현재 의학수준으로는 망막의 필름이 타버린 것은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망막 필름도 재생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희망을 가지고 산다. 그래서 이 나이에 아직도 진성에서 미용실을 하고 있다. 창훈이에게 도움이 될 때를 대비해서 그렇다. 또 진주보건대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 현재 3학년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진학했다. 

 

이현학 바리스타는 일주일에 2~3일 후배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카페 좋은 이웃에서 바리스타로 봉사하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이현학 바리스타는 일주일에 2~3일 후배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카페 좋은 이웃에서 바리스타로 봉사하고 있다. 사진=박청기자

 

◈서울 종로구 혜화동 좋은 이웃 카페, 시각장애인 이현학(33) 바리스타


커피내리고 서빙까지 혼자서 척척

 

시각장애인들의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하는 좋은이웃 컴퍼니에서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좋은이웃’카페의 바리스타 이현학(33)씨. 그 자신도 시각장애인이다. 

기자가 이창훈 아나운서를 인터뷰하기 위해 좋은이웃을 방문했을 때 카페를 지키고 있던 이현학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런데 기자는 처음에는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현학씨 혼자서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를 맞을 때 이 바리스타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정상인과 다른 그 무엇을 느낄 수 없었다. 얘기를 나누던 중 이 바리스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 신기해 자꾸 말을 시키게 됐다. 그러나 이현학 씨는 이러한 기자의 호기심과 질문에 그리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않았다. 정상인들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오래 자주 겪었기 때문인지 당연하다는 듯 민감한 질문에도 잘 응해줬다.  

이현학 바리스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 혜화동에 사는 동네 어른 세분이 카페에 들렀다. 그분들 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3잔을 주문했다. 계산을 할 때까지 이현학 씨가 시각장애인인 것을 모르고 “자리에 좀 날라다 줘요.”하고 말했다. 기자가 걱정이 돼서  “어르신. 바리스타가 시각장애인인데요.”라고 말했더니 “아 그래요. 나는 몰랐지.”하고 말하니 이현학씨가 “괜찮습니다.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라면서 자리에 가시라고 권했다. 그 어르신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자리에 가서 친구들과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어르신이 자리에 돌아간 후 이현학 바리스타는 익숙한 솜씨로 아메리카노 세잔을 내려서 쟁반에 담아 그 어르신 세분이 앉아있는 자리에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들고 가 자리에 놓고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정상인과 아무차이가 없었다. 기자가 하도 신기해 “눈이 조금 보이냐?”고 약간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눈이 보이는 것은 아니고 시각장애인이라도 익숙한 공간에서는 활동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정상인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 인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현학 바리스타는 일주일에 이틀정도 여기서 봉사를 하고 나머지는 이창훈 아나운서와 함께 후배 시각장애인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자신도 음악 등 공연을 한다고 했다. 

김성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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