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일 의사와병행 아닌취미
EBS 면접 때 영어로 진주 소개해
진주에서 초,중,고,대 모두 졸업
“김보은 아나운서는 나의 은인”
영어의학방송 기회되면 하고파

진주에서 나고 자란 임지은씨. 게임, 운동, 음악 등 가리지 않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나중에 영어로 된 의학방송을 진행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김성대기자
진주에서 나고 자란 임지은씨. 게임, 운동, 음악 등 가리지 않는 도전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나중에 영어로 된 의학방송을 진행해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김성대기자

임지은(36, 구미 바른유병원 원장)씨는 의사와 아나운서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본인은 ‘병행’이라는 말을 선호하진 않지만 현실은 그렇다. 그는 진주에서 나고 자랐다. 초,중,고,대학교를 모두 진주에서 다녔다. 어린 시절 조용한 성격에 중소도시에 산다는 현실까지 겹쳐 열등감을 겪었지만 그 열등감은 의대 진학과 더불어 모두 날아갔다. ‘공부면 다 되던’ 시절. 대학 생활은 그의 내면에 잠재돼 있던 적극성과 활기를 끄집어 내줬고 임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에 임했다. 그런 그가 아나운서 생활을 접하게 된 건 경북 구미에서 스피치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김보은 아나운서 덕분이었다. 임씨는 면담을 하면서 김보은 아나운서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또한 스피치가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학창시절 때 곧잘 했던 영어까지 곁들이면서 그는 언어 감각에 날개를 달아 결국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봉송 MC까지 맡게 되었다. 하나도 벅찰 의사와 아나운서 직업을 두고 임씨는 당연히 자신의 본업은 의사라고 잘라 말했다. 아나운서를 자기 직업이라고 말하는 건 다른 프로 아나운서들에게 실례되는 일이라고 했다. 다만 가능성은 열어두었다. 아직 국내에 전무한 영어 의학방송, 그리고 지역방송 출연 제의를 그는 적극적으로 바라지도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외면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좋은 뜻에서 욕심쟁이였다.

◇어린 시절 열등감 대학 가서 모두 날려

-진주가 고향인가?

△그렇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모두 진주에서 다녔다.

-어느 학교를 다녔나.

△근래 모 사건으로 시끄러웠던 망경초등학교를 졸업해 선명여자중학교(현 경해여자중학교), 삼현여자고등학교, 경상대의대를 다녔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은 언제인가.

△대학교 때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그저 조용한 인물이었다. 눈에 띄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했다. 진로에 대한 방황 같은 건 없었지만 조용하고 평범한 정도가 좀 심했다. 그런데 대학은 나랑 비슷한 성적을 받은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다른 환경이었다. 의대에는 유급이라는 것이 있다. 다 A인데 한 과목만 B가 나와도 후배와 학교를 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잘해야 되겠다는 강박이 있었다. 또 의대는 서열을 중시 하는 곳이어서 원치 않은 것들을 해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 덕분에 동기들과 끈끈할 수 있었다. 많은 학업량을 혼자서는 끌어나가기 힘들어 서로 끌어주며 스터디를 함께 한다. 대학 생활은 힘든 시기이기도 했지만 심리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사실 의대를 들어가기 전엔 열등감이 많았다. 항상 조용한 스타일었고 리드를 잘 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공부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였다면 의대를 못 갔을 거다. 평범하긴 싫고 누군가에게 특별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공부 밖에 없었다.

응급실 인턴 시절 모습. 임씨는 “모르면 상급연차나 교수님들께 배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응급실 인턴 시절 모습. 임씨는 “모르면 상급연차나 교수님들께 배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의대가 적성에는 맞았나. 

△처음엔 몰랐다. 나중에 의대가 내 적성에 맞구나 싶었다. 의대 들어가면 기초 과학, 생화학, 물리학 등을 배우는데 과목들이 나와 잘 맞았다. 일주일 또는 이주에 한 번 시험의 연속인 것도 견딜 만 했다. 나는 82년생인데 사실 그 시절은 ‘공부만 잘 하면 다 돼’라는 의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했던 때였다. 요즘과는 달랐다. 요즘엔 근처 고등학교 직업인 교육만 나가봐도 학생들이 공부 외 활동들도 많이 하고 있고 평가도 받고, 동아리나 취미 활동도 누린다. 공부 외 다른 재능들도 인정해주는 분위기인 거다. 하지만 우리 때는 달랐다. 공부 아니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고등학교 때까진 그런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언젠가 중학교 단짝이 호주로 유학 간 일이 있는데 나도 보내달라 부모님께 떼를 썼다. 그 친구는 2년 뒤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렇게 10년 정도를 더 살아보니 학창 시절 때 부럽던 사촌동생, 호주 유학 간 친구, 부잣집 친구들 삶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왜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 귀한 시간들을 다 흘려 보냈을까, 후회도 했다. 내 부모님은 교육열은 많았지만 방법을 모르셨다. 나에게 좀 더 많은 걸 보여주었다면 아마 내가 그런 열등감을 덜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조카들에게 많은 걸 보여주고 재능을 찾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어린 시절 진주는 어떤 곳이었나.

△친척들은 다 서울에 있었다. 숙모와 이모부 등 외가 식구들이 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진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소도시에 산다는 괜한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살았던 거다. 외가 친척들은 나에게 ‘서울에 살아야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그 생각도 대학 가서 깼다. 당시 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생 치고는 꽤 수입이 괜찮았다. 그 돈으로 이제 방학 때마다 여행을 다녔다. 그러면서 ‘서울도 별 거 아니네’ ‘대한민국 좁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웃음) 세상 속 나의 위치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고. 많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어린 시절 가졌던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나.

△두 분 다 시골에서 자랐는데 어머니는 동네에서 손꼽는 부잣집 딸이었다. 하지만 외가는 딸, 아들 차별이 굉장히 심한 곳이었다. 어머니의 오빠, 그러니까 외삼촌에게 모든 게 집중된 거다. 외가 쪽 어르신들은 공부도 ‘땅 이어 받아 농사 지으면 잘 먹고 잘 살 텐데’ 주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공부를 원했고 작은외삼촌이 부산으로 유학 갈 때 함께 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어머니는 그때 일본어와 자수를 배웠다고 한다. 아버진 반대로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께서 조금 무서운 분이셨는데 아마도 그것이 아버지의 무뚝뚝한 성격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럼에도 부성애는 굉장히 강한 분이시다.

-본인은 어느 쪽을 닮은 것 같나.

△어린 시절엔 아버지 성격, 지나고 보니 어머니 쪽인 것 같다. 지금은 어머니처럼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니까. 아버진 사업을 하면서도 사람 만나길 꺼리셨다. 대외 활동은 대부분 어머니에게 맡겼다.

지난 17일 임지은씨는 프로 방송인 이기상씨와 함께 진주, 사천 지역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사회를 맡았다. 그는 이기상씨를 보며 프로의 여유를 느꼈다고 했다. 사진=박청기자
지난 17일 임지은씨는 프로 방송인 이기상씨와 함께 진주, 사천 지역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봉송 사회를 맡았다. 그는 이기상씨를 보며 프로의 여유를 느꼈다고 했다. 사진=박청기자

◇스피치는 자기 관리의 일환

-경북 구미로 오게 된 이유는. 다시 진주로 올 계획은 없나.

△결혼을 하면서다. 남편이 구미에 군의관으로 갔고 나는 레지던트 끝나고 대구로 왔다. 진주로 갈생각은 아예 없진 않다. 공부를 조금 더 해볼까, 로컬에 남아 그냥 편하게 살까, 아니면 서울로 가 펠로우 더 해서 스텝을 해볼까 생각 중인데 막상 스텝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하루하루가 힘들어 보여 그것도 고민이다.(웃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의사 생활 얘기 좀 해달라.

△2008년 인턴 생활을 시작해 9년을 보냈다. 레지던트가 끝나고 9시 출근 6시 퇴근 적응기간이 있었는데 처음엔 좀 힘들었다. 왜냐하면 레지던트 때는 교수님이나 상급연차들에게 달려가 물어볼 수 있었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내가 다 공부해야 되는 거다. 학회도 내가 필요해서 다니고 책도 계속 사봐야 했다. 그렇게 몇 년 흐르고 나니 지금은 편하다. 주말에 학회 듣는 일도 개인 생활과 밸런스를 맞춰가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 느낌이다.

-의사와 방송활동을 병행하는 것이 독특하다.

△병행까지는 아니다.

-그래도 끼와 노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구미에 왔을 때 오전근무를 했다. 오후에는 취미 활동을 했는데 당시엔 스트레스 풀 수 있는 게 퇴근 후 쉬는 일 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욕심이 많다. 그림, 악기 스피치 등 안 된다 생각만 말자는 주의여서 여기저기 학원을 많이 다녔다. 그러다 만난 사람이 김보은 아나운서다. 

-’김보은 아나운서 스피치 아카데미’라고 들었다.

△맞다. 그분 남편 분이 구미에서 직장을 다녀 보은님도 같은 지역에서 아카데미를 연 것이다. 아나운서는 계약이 끝나면 프리랜서 생활을 해야 한다. 행사철이 아닐 때는 한 달도 쉬고 두 달도 쉰다. 김보은 아나운서는 그 상황을 아카데미를 열어 후배를 양성하며 풀었다. 

임지은씨가 6살 때쯤 동생과 함께 촉석루에서. 그는 당시 유치원 대신 태권도 학원을 다녔는데 동생이 입은 체육복은 그때 임씨의 학원복이었다.
임지은씨가 6살 때쯤 동생과 함께 촉석루에서. 그는 당시 유치원 대신 태권도 학원을 다녔는데 동생이 입은 체육복은 그때 임씨의 학원복이었다.

-스피치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됐나.

△살다 보니 스피치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를 가꾸고 옷만 예쁘게 입을 게 아니라 호감도 측면에서 스피치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스피치는 자기 관리의 일환이다. 태도와 말투, 생각 등에서 오랜 기간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20대 때부터 나에 대해 들여다보는 노력을 해왔다. 그러면서 인간 관계와 대화 기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을 때 과연 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하물며 다양한 직업군, 다양한 사람들을 환자로서 대하는 의사에게 스피치는 더 없이 중요하다. 말에 대한 환자들에 반응은 모두 다르다. 화를 내는 사람, 척척 알아듣는 사람,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스피치는 말을 예쁘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의사소통에 더 가깝다. 

-아카데미는 어땠나?

△처음엔 큰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보은님과 대화를 나눠보니 존경심이 생기더라.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고, 다른 아카데미들처럼 ‘수강생 늘려야지’ 마인드가 아니어서 좋았다. 되레 용기를 불어넣어줬고 내 가능성을 높이 봐주셨다. 아나운서 되라는 게 아니라 시험 준비 과정에서도 많은 걸 배우고 성장하게 된다고 보은님이 조언해줬다. 그는 나에게 은인이다. 

-생활에 터닝포인트가 됐을 것 같다.

△매일 똑같은 하루만 보내다 엄청난 활기가 됐다. 한번은 TBC대구방송에서 글로벌주니어 기자단 육성 교육이란 걸 했다. 대구 지역에서 김보은 선생님이 나가셨고 같이 할 사람 필요하다 했다. 그때 날 추천하신 거다. 아이들에게 기사 쓰는 법과 영어 아나운싱을 가르치는 주말 수업이었는데 큰 책임감이 들었고 무엇보다 보은님에게 누를 끼쳐선 안 되겠단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동계올림픽 성화 영어MC “진주, 사천은 꼭 내가!”

-영어는 어떻게 잘 하게 된 건가.

△학교 때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다. 발음을 혼자 연습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싶어 더 열심히 했다. 알파벳은 초등학교 졸업 후에 배웠는데 발음이 좋다고 처음 칭찬을 들었다. 그때는 이상하게도 컴퓨터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에 대한 애정은 그때부터 생긴 것 같다. 이후 중고등학교 때 영어에 욕심을 많이 냈다. 대학에서도 진단검사의학과 실습 돌 때 발표를 영어로 했던 적이 있다. 내심 좋았다.(웃음) 영어 아나운싱은 서울에서 가르치는 곳이 세 곳 있는데 믿음 가는 곳에 등록해 교육을 받았다. 

-EBS 영어 아나운서 합격 이야기를 듣고 싶다.

△보은님이 폰 메시지로 채용 공고들을 일일이 보내주신다. 그러다 평소 잘 안 뜨는 EBS 공고를보내주셨고 한 번 해보지 않을래 해서 도전하게 된 거다. 처음엔 내가 네이티브도 아니고 가능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리랑TV나 TBC FM 영어 방송과 달리 EBS는 깨끗하게 발음하면 좋아한다고 했다. 물론 한국어도 돼야 한다. 그 시험은 음성 파일로 영어와 한국어를 녹음한 것 하나씩을 보내야 했는데 보낸 뒤 일차 서류에 합격했고 면접까지 운 좋게 통과했다.

-자격 요건 중에 ‘지역의 문화, 역사, 관광지 등에 식견이 있는 자’도 있던데 이쪽에도 관심이 많은 것인가.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냥 영어로 진주를 소개했을 뿐이다. 진주의 위치와 인구, 산청〮사천〮하동〮창원에 둘러싸인 분지 도시, 남강이 흘러 아름다운 자연경관, 개천예술제와 유등축제, 드라마페스티벌 개최지, 육회 비빔밥 등 식도락 여행지로 유명하다 정도를 영어로 옮겼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 진주 성화봉송 행사에서 사회를 맡았는데.

△다니는 서울 쪽 아카데미 대표님이 성화봉송 관련 사회를 맡고 계셨는데 영어 MC가 필요하다고 했다. 남자 MC인 방송인 이기상씨와 호흡을 맞추는 일이었는데 진주와 사천만큼은 내가 직접 하고 싶었다. 평창동계올림픽 MC 선발 과정은 꽤 까다로웠지만 동영상과 프로필 심사에 통과해 성사된 거다. 이기상씨가 워낙 프로셔서 더 긴장했던 기억이다.

-지은씨도 프로가 아닌가.

△그건 아니다. 이 일을 직업이라고 하기엔 사활을 걸고 해나가시는 다른 프로 분들에게 죄송하다. 경력이 화려한 것도 아니고. 물론 내 본업과 맞물린 일들이 들어오긴 한다. 해외 지사 병원들 영어 홍보 나레이션 같은 일들. 만족하고 있다.

◇기회 되면 영어 의학 방송 하고 싶어

초등학교 졸업식 날. 짧은 머리 때문에 사람들이 남자아이로 착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시선들이 임씨의 소극적인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줬다고 본인은 말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짧은 머리 때문에 사람들이 남자아이로 착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시선들이 임씨의 소극적인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줬다고 본인은 말했다.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8시30분 출근 5시30분 퇴근이다. 퇴근 후엔 매일이 다르지만 요즘엔 기타를 배운다. 그리고 각자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들 1년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드니까 온라인 게임으로 만나자 해서 일주일에 한 번 PC방에 가 ‘오버워치’를 한다.(웃음) 그리고 동남아 쪽 여행 가서 직접 오토바이를 몰아보려고 사촌 남동생들에게 오토바이도 배우고 있다. 

-정말 욕심이 많은 것 같다.(웃음) 잘 하는 운동은.

△사회생활용으로 당구(사구)와 볼링을 좀 치고 골프는 하프스윙까지 하다 몸이 안 받아줘서 끊었다. 탁구도 한 2년 쳤고 요가는 대학 때 6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했다. 시간만 나면 먹어둬야 했던 레지던트 때였다. 구미로 와선 테니스도 배웠다

-의사와 아나운서 일을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 생각인가.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 외 다른 직군들 사람들을 만나면 많은 걸 느끼게 된다. 나의 열등감이 나를 조금 더 채찍질 하는 느낌이랄까. 가령 프리랜서들의 불안감은 그들을 더욱 공부하게 만들뿐더러 그 불안감이 차라리 원동력이 되더라. 과거 내 열등감이 내 인생의 원동력이 됐듯. 아나운서 역시 겉으로 보면 화려해 보이지만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에 그렇게들 열심히 하는 거였다. 의사, 아나운서로서 지금 목표가 하나 있다면 EBS 면접 때 보니까 2, 3분짜리 짧은 한국말 의학방송은 넘치지만 영어로 전달하는 의학방송은 아직 없었다. 나중에 꼭 해보고 싶다. 지역 방송사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오면 글쎄. 욕심이 없진 않다.(웃음)

김성대 기자 사진제공=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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