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의 모습을 24개의 동작으로 구현한 전통무용
양산 통도사에서 추기 시작해 해방이후 활성화

학의 모습을 무용으로 만든 ‘학춤’이 있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설이 있는 우리나라 전통 춤인데 아직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학춤’에 미쳐 결혼도 미룬 채 평생을 학춤의 보급과 무형문화재로 지정에 매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학춤’ 전승자 월산 박계현 선생(57)이다. 

월산 선생은 진주에서 문화예술활동을 크게 진흥시킨 전 진주문화원장, 경남일보 사장 등을 지낸 박세재 선생의 막내딸이다. 누구보다 전통예술을 사랑했던 박세재 선생이지만 막내딸이 춤을 추는 것은 못마땅해 월산은 살아생전에는 드러내 놓고 춤을 추지 못하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공개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평생을 학춤의 전승과 보급 그리고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두 번의 무형문화재 심사에서 보류된 학춤은 그동안 과제들을 대부분 해결하고 내년도에 다시금 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학춤은 학의 모습을 24개 동작으로 표현한 무용으로 양산지방에서 추어 왔다고 기록에 나온다. 그러나 전승자였던 김덕명 선생이 진주에서 오래 동안 살아 진주의 전통춤이 되기도 한 춤이다. 

마침 진주시의 시조가 학이란 인연도 있다. 그래서 월산 선생은 진주시민들이 학춤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길 부탁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월산 박계현은 학춤 전승자인 김덕명 선생이 진주에 오면서 선생으로부터 학춤을 배워 수제자로 인증을 받았다. 사진=박청기자
월산 박계현은 학춤 전승자인 김덕명 선생이 진주에 오면서 선생으로부터 학춤을 배워 수제자로 인증을 받았다. 사진=박청기자

-학춤 전승자인데 학춤이 무언가.

△학춤은 양산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학의 모습을 본뜬 춤이다. 

-역사가 어떻게 되나.

△신라시대부터 전승돼 온 곳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이는 확인할 수 없다. 자료로서 확인 가능한 것은 양산 통도사 주지를 했던 신수경 스님에서부터이다. 신수경 스님이 1900년대 초반에 통도사의 주지를 하면서 행사 때 학춤을 추었다. 그게 사료로서 확인 가능한 최초이다. 그러나 사찰에서는 이러한 학춤의 전승이 끊겼다. 

-그럼 지금 추고 있는 학춤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양산 지방의 기방에서 학춤을 추었다고 한다. 신수경 스님과 비슷한 시기인 1900년대 초반은 양산지방에서 황종렬 선생이 추셨고 그 이후에는 제자인 김덕명 선생이 추셨다. 김덕명 선생은 해방 전부터 2015년 돌아가실 때까지 학춤을 추셨다. 저는 김덕명 선생의 수제자이다. 

◇1900년대 초 양산통도사 신수경 스님이 학춤을 춘 기록

-학춤은 어떤 것인가. 

△학춤은 24개의 동작으로 학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학이 하늘에서 날고 땅에 내려 앉고 먹이를 찾고 먹이를 찢고 먹는 동작들을 상세하게 표현하는 춤이다. 여성이 추기에는 좀 어렵다. 춤을 출 때 사대부 복장을 하고 추고 동작이 크다. 도약하는 것 등 ‘기’를 이용해 추기 때문에 여성이 추기에 좀 힘든 부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덕명 선생 밑에서 여성인 제가 수제자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런데 이 학춤이 무형문화재 지정에서 두 번이나 보류됐다고 들었다. 

△1976년 국가 무형문화재 지정이 보류됐고 1997년도에는 관보에 게재까지 됐으나 부결됐다.

-이유가 무엇인가. 

△무형문화재가 되기 위해서는 전승문제, 계보문제 등이 깔끔하게 정리돼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미진한 부분이 있었다.  

-전승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라시대 사찰에 있었다는 문제인데 이는 자료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 설에 불과하다. 그런데 근래에 양산 통도사에서 신수경 스님이 춤을 추었다는 자료를 확보해 이 문제는 해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계보라는 건 무엇인가.

△제자 문제 등 서열문제인데 저의 경우 1999년 김덕명 선생께서 수제자라고 공증까지 해 주셨다. 그래서 이런 부분도 해결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김덕명 선생의 아드님이 계신데 춤과는 상관이 없이 아들이니까 본인이 전승자라고 주장하는데 그 부분은 정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 춤이 양산에서 탄생했으니 양산사람이 해야 된다는 등의 주장인데 김덕명 선생이 1976년~2000까지 25년을 진주에서 사셨다. 이미 진주의 전통예술로 뿌리가 내렸다고 생각한다. 

-박 선생이 수제자라는 증명이 공증 이외에는 없나.

△제가 춤이 원형을 보유하고 있다. 원래 학춤은 13분이었는데 좀 긴 측면이 있다. 그래서 중복성 있는 동작을 배제하고 9분으로 줄였다. 그러면서 춤사위가 정리됐다. 이런 부분들을 저와 김덕명 선생이 함께 했다. 

학춤은 학의 모습을 24개의 동작으로 표현한 춤이다. 사진의 월산 박계현이 학춤을 추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박계현
학춤은 학의 모습을 24개의 동작으로 표현한 춤이다. 사진의 월산 박계현이 학춤을 추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박계현

◇학춤 전승자인 김덕명 선생의 수제자

-그럼 학춤을 추는 다른 사람들과 박 선생은 좀 다르나.

△그렇다. 저는 김덕명 선생이 50대일 때 배웠고 현재 양산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은 김 선생님이 70대에 배웠다. 그래서 춤사위가 많이 다르다. 무형문화재는 예술성, 기능성, 역사성, 전승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서 제가 무형문화재가 되기 위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양산에 양산학춤보존회가 사단법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기 활동하는 사람들이 다 제 제자이거나 후배들이다. 제가 상임고문으로 이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럼 무형문화재를 다시 신청할 것인가. 

△그렇다. 세미나 등을 통해 전승계보 등에 대해 재조명 한 다음에 내년쯤 재신청을 할 생각이다.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나.

△무형문화재는 뭐라 해도 기량이 우수해야 한다. 기량이 부족하다면 무형문화재로 큰 가치가 없다. 그런 점에서 학춤의 전승자는 제가 되어야 한다는 게 합의가 돼 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계기로 학춤을 배우게 됐나.

△1970년대에 진주문화원장과 진주민족예술보존회 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아버지 박세재 선생이 당시 전국의 전통춤을 추는 사람들을 진주에 초빙을 하셨다. 그때 양산의 김덕명 선생도 초빙자 중의 한분이셨다. 김덕명 선생이 그 이후 진주에 계시면서 학춤과 승무 등을 진주에 뿌리내리게 하셨다. 그때 김덕명 선생으로부터 학춤을 배우게 됐다. 

-원래 무용을 하고 있었나.

△아니다. 저는 원래 무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천예술제 때 집에 무용가들이 많이 오면서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재능이 있었던 가 보다. 그런데 집에서 반대가 심해 정규교육과정에서 무용을 배우지는 못했다. 

-아버님이 예술을 사랑하시는 분이셨는데 왜 춤을 추지 못하게 하셨나.

△춤추면 기생된다고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펜싱 등 운동을 하기도 하는 등 옆길로 많이 갔다. 그런데 당시 진주에 사시던 장데레사 선생 등 무용선생님들이 제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셔서 개인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그랬다. 그러다가 1976년 고등학교 때 진주검무의 전수학교에서 정식으로 무용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주검무 초대 보유자이신 김자진선생 그 이후 김수학 선생 등에게서 사사 받았다. 

◇1976년 김덕명 선생이 진주로 오면서 학춤 배워

월산 박계현이 학춤을 추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박계현
월산 박계현이 학춤을 추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박계현

-그럼 무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인 81년부터 춤의 길로 본격 들어섰다. 

-무용가로서 주요 경력은 어떻게 되나.

△1985년도에 김해시립무용단 훈련장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박월산 무용학원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왔다. 

-주요 공연은 어떤 것들이 있나.

△80년에 한국의 집에서 운영하는 한국무용단에 선발이 됐다. 거기서 무용단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공연을 했다. 2010년부터는 한국의 명무반열에 올라서 주요공연 때 초청을 받는다. 

-진주에 온 것은 언제인가.

△83년에 경남대에 진학하면서 공부를 하게 됐다. 경남대에 오면서 지방생활을 하게 됐는데 86년에 진주에 월산무용학원을 내면서 정착하게 됐다. 그 이후 진주에서 학산 춤 연구회를 조직해 운영해 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소중한 학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돼서 보급을 확대하고 세계화 시키는 꿈을 꾸고 있다. 우리의 학춤은 서양의 ‘백조의 호수’에 버금가는 예술성을 가지고 있다. 

-진주의 무용계 사정은 어떤가.

△진주는 표면에 드러난 춤 보다는 원조 춤, 전통성을 살려서 원형을 보존하는 전승 채록 등이 시급한 시기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특히 진주시의 새가 학이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진주의 춤을 창안하고 싶다.

양산 학춤 보존회 회원들. 사진제공=양산학춤보존회
양산 학춤 보존회 회원들. 사진제공=양산학춤보존회

◇촉석루 정문 옆에 있던 집에서 박세재 선생의 막내딸로 태어나

-진주가 고향인데 언제 태어났나.

△1960년 본성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촉석루 정문 옆이 어릴 적 살던 집이었다. 어릴 때 살던 집은 일본식 가옥이었는데 당시 집안에 나무가 많았다. 이 나무들이 진주성 성지정비작업을 하면서 모두 진주시에 기증해 지금 성안에서 옮겨져 심어졌다. 지금도 진주성안에 가면 예전 우리 집에 있던 나무들을 보면서 추억에 젖곤 한다. 

 -경상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무형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다 보니 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스승인 김덕명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 공부의 결과로 2014년에 경상대학교에서 ‘김덕명 전통춤과 전승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성대 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경남연합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