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과 3년 때 교통사고 계기로 요가 시작해
숙대무용과 아시안게임ㆍ서울올림픽무대올라

진주교육대 99년만의 ‘1호’ 겸임교수

경상대 3년간 박사 과정 수료
하루 11시간 강의할때도 있어

진주시 가좌동 선요가원 박은지 원장은 “요가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요가는 몸과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엄연한 철학이다”고 말했다.
진주시 가좌동 선요가원 박은지 원장은 “요가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요가는 몸과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엄연한 철학이다”고 말했다.

진주 가좌동 경상대학교 인근에 있는 선요가원 박은지 원장은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진해지만 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진주에서 다녔다. 대학은 숙명여자대학교 무용과엘 진학했다. ‘춤은 안 된다’는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자식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밀어주었던 어머니의 후원으로 박 원장은 무용을 배울 수 있었다.

숙대 무용과를 다니며 박 원장은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서울올림픽 개ㆍ폐막식 무대를 경험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용은 그의 평생 직업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은 무용 교육 환경의 현실은 실력은 물론 인맥과 재력도 중시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박 원장이 무용 배우는 일에 회의를 느끼려던 때 학교 기숙사 비탈길에서 택시와 사고가 났다. 사고 후 겉은 멀쩡했지만 한 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그는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는 박 원장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 건강을 되찾아 준 것은 물론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요가는 그의 성격을 부드럽게 바꿔줬고 생활에 여유를 찾게 해줬다. 무엇보다 박 원장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을 요가를 통해 배웠다.

박 원장은 서울 요가 센터에서 요가를 배우기 시작해 29살에 다시 진주로 왔다. 그 전 한국과 인도를 오가며 3년 반을 보낸 그는 2000년 1월2일 자신의 요가 센터인 선요가원을 진주시 중안동에 오픈했다. 10년 후 센터는 지금의 진주시 가좌동으로 옮겨졌다. 

선요가원은 어떠한 모방도 없는, 100% 창작에 기반 한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박 원장 말에 따르면 선요가원 회원들은 모두가 올바른 요가, 그렇지 않은 요가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요가 지도자와 다수의 회원 구도가 아닌, 회원 모두가 요가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개성으로 선요가원은 서울, 창원 등 외지 사람들도 꾸준히 찾는 진주의 대표 요가원이 됐다.

대학교 3학년 때 집에서 찍은 모습. 대학생활을 서울에서 한 박 원장은 29살 때 다시 진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요가를 알려 나갔다.
대학교 3학년 때 집에서 찍은 모습. 대학생활을 서울에서 한 박 원장은 29살 때 다시 진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요가를 알려 나갔다.

◇자매 셋 모두 예체능계, 초등3년 때 무용 시작

-고향이 어디인가.

진주에서 태어나진 않았다. 태어난 곳은 진해다. 아버지, 어머니는 진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경상대 농대를 졸업하셨고 농촌진흥청 공무원이셨다. 그런데 아버진 앉아 일하는 걸 싫어하셔서 승진까지 한 공무원을 그만 두고 건축 사업을 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게 불만이다(웃음).

-그럼 언제부터 진주에서 산건가.

진해에서 4살 때까지 살다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모두 진주에서 다녔다. 평거초등학교, 진주여자중학교, 그리고 삼현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대학은 숙명여자대학교 무용과로 진학했다.

-형제는 어떻게 되나.

1남3녀 중 내가 셋째다. 막내 남동생이 있다.

-요가보다 무용을 먼저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 따라 무용 학원을 갔다. 그때 어머니가 무용을 해보라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 사실 어머니가 고등학교 때 무용을 했다. 직업은 유치원 선생님이었지만. 지금도 팔순에 스트레칭을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해내신다.

-형제들도 그런 끼를 물려받았나.

부모님이 교회 신자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우리 모두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결국 둘째 언니는 음대에 들어가 지금 음악 선생님을 하고 있다. 큰언니는 미대를 나왔고 나는 무용과로 진학한 거다. 어머니는 자식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다 밀어주는 스타일이었다. 자식 교육에는 100% 지원해주셨다. 물론 딸 셋을 예체능계 쪽으로 진학 시켜 뒷바라지를 했으니 많이 힘드시기도 했다. 예능계 쪽으로 가지 않은 사람은 남동생이 유일하다.

-세 명을 예능계로 진학시켰으니 집안 형편이 풍족한 편이었겠다.

힘들게 살진 않았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포니’라는 차도 집에 있었고, 심지어 그 차를 모는 기사 분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건축업을 하신 아버지 거처 문제로 큰 언니는 학창시절 무려 13군데를 전학 다녀야 했다. 집을 지어 팔고, 또 다른 집을 지어 파는 과정에서 언니는 도동초등학교에 입학해 중앙초등학교(현 진주초등학교)에서 졸업했다.

-그렇게 무용을 시작한 건가.

그대로 무용학원엘 등록했다. 그땐 무용이 재밌었다. 스스로가 무대 체질이었던 것 같다. 한지 얼마 안 됐는데 선생님들도 타고났다고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땐 사물놀이 팀에서 장구도 치고, 진주 각종 행사에도 나가고 그랬다. 무용은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 했는데 아버지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했다. 피아노나 노래는 괜찮은데 무용은 안 된다고 하셨다. 춤은 안 된다, 공부를 해라. 당시 국가 지정 대회에서 3등 이상 하면 진주여고 특기생 입학이 가능했는데 그리 되진 못했다.

-그렇게 삼현여고에 입학을 했다.

1학년 땐 공부를 했다. 그리고 2학년 때 교내 무용 선생님을 만났다. 그 길로 엄마에게 다시 무용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앞서 말했듯 자식이 하고자 하는 건 절대 반대하지 않는 엄마였다. 뭐든 다 시켜줬다. 공부가 안 된다, 그러면 과외를 시켜줬다. 그래서 둘째 언니에겐 가정교사까지 있었다. 단, 네가 못해낸 걸 갖고 부모 핑계를 대지 마라는 조건은 있었다.

-그길로 무용인의 길을 걷게 된 건가.

주말마다 연습하고, 평일엔 자율학습 끝나고 강당에서 연습했다. 무용은 나에게 취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닌 ‘대회 같은 건 나가지 마라’고 했다. 사실 전문가로부터 독무 하나 받는데 적게는 5백만원, 많게는 1천만원을 웃돌았다. 의상도 100만원에서 300만원을 오갔다. 그런데 정작 그런 대회 성적이 대학 가는데 도움이 많이 되진 않는다. 개천예술제 같은 데서 받은 상은 가산점으로 쳐주지 않는 것이다. 어머닌 ‘성적 잘 받으면 서울 학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렇게 공부와 무용을 병행하던 나는 서울 친척 집에서 무용학원을 다니게 된다.

경상대학교 체육교육과 대학원 박사논문 세미발표 표지. 박 원장은 특유의 추진력과 의지로 본업을 따로 두고 보통 4-5년은 걸린다는 대학원 박사 과정을 2005년부터 2008년까지 3년 만에 수료해냈다.
경상대학교 체육교육과 대학원 박사논문 세미발표 표지. 박 원장은 특유의 추진력과 의지로 본업을 따로 두고 보통 4-5년은 걸린다는 대학원 박사 과정을 2005년부터 2008년까지 3년만에 수료해냈다.

◇“내가 원하던 무용 교육 환경이 아니었다”

-서울 생활은 어땠나.

연습의 나날이었다. 학원 선생님이 예중, 예고, 입시 애들 연습할 때 다 와서 연습하라고 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 가 학원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처음엔 타지에서 서러웠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거니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무용과는 이화여대와 숙명여대, 한양대, 중앙대가 유명한데 아버지가 남녀공학 대학은 안 보내준다고 했다. 그래서 숙대 무용과 실기 시험을 봤는데, 무대 체질이어서인지 떨지 않고 아주 잘 봐서 합격했다.

-타지 대학생활이 시작 됐다.

입학 하면서 부모님과 두 가지 약속을 했다. 무용과 가는 대신 학업에 충실할 것, 그리고 등록금은 알아서 해결할 것이었다. 아버지와 각서까지 썼다(웃음). 숙명여대는 지방학생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기숙사 정원은 180명이었는데 학점이 떨어지면 기숙사에서 나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부모님은 그런 기숙사에 4년 동안 있으면서 장학금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용과엔 장학금, 그러니까 근로 장학금 같은 게 없다. 무용과 오려면 그럭저럭 집안 형편이 괜찮아야 했기 때문이다. 성적 장학금은 과에서 1, 2등을 해야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대학 1학년 때는 자유를 만끽해야 하지 않나.

사실 내 성격이 엄청 보수적이다. 학교 가서부터 학생들이 화장을 하고 오는 게 이해가 안 됐을 정도였다. 그리고 대학교 기숙사 점심 때 짜장면을 처음 봤다(웃음). 학창 시절 공설운동장 쪽에서 16번 버스 타고 진양호로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양호는 닭백숙이 유명해 그나마 닭요리는 많이 먹어봤는데 짜장면은 그 때 처음 봤다.

-그래서 부모님 뜻에 따라 공부를 했나.

처음엔 애들하고 놀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신세 지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밥값, 찻값을 계속 내가 내게 됐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도 계속 내 돈을 쓰게 될 것 같았다. 한 번은 그렇게 돈을 쓰다 보니 용돈이 다 떨어져서 집에 얘기한 적도 있다. 한 달째는 주더라. 엄마는 우리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고 항상 응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두 달째엔 엄마로부터 편지가 왔다. 아껴 쓸 줄 알았다,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은 것 같은데, 정도의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읽으며 기숙사 2층 침대에서 엄청 울었다. 그러고 깨달았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생각한 거다.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없나.

당시만 해도 밤8시30분이라는 기숙사 통금 시간이 있었다. 공연이나 행사 때는 외박증을, 외출할 때는 1시간짜리 외출증을 줬다. 그래서 제대로 알바를 할 수가 없었다. 공부 하랴, 연습 하랴. 시간이 안 났다.

-어머니 편지를 계기로 생활패턴이 바뀐 건가.

공부를 했다. 친구들은 그때부터 내가 도서관에 사는 줄 알았을 건데, 사실 기숙사에서 약학대 언니들에게 공부하는 것 배우고 그랬다. 새벽 6시가 되면 무용 연습을 했고 오전에도 연습, 낮에는 수업을 들었다. 그렇게 2학기 때 장학금을 받아 사감 선생님에게 케익도 사다드리고 했다.

숙명여자대학교 무용과 재학 시절 박 원장은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이라는, 대한민국 현대 스포츠사의 굵직한 두 무대에 올라 재능을 뽐낸 바 있다. 사진(왼쪽 끝)은 88년 서울올림픽 폐막 공연 후 찍은 모습.
숙명여자대학교 무용과 재학 시절 박 원장은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이라는, 대한민국 현대 스포츠사의 굵직한 두 무대에 올라 재능을 뽐낸 바 있다. 사진(왼쪽 끝)은 88년 서울올림픽 폐막 공연 후 찍은 모습.

-연애는 안 했나.

인기가 없진 않았다(웃음). 옛날에는 타 대학교 학보에다 띠를 둘러 몇월 몇일 만났으면 좋겠다, 같은 내용의 편지를 과사로 전해 이성끼리 만나곤 했다. 당시 엄마는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친해보고, 저 사람이 나의 무엇을 좋아할까, 왜 날 좋아할까를 따져보라고 했다. 그런데 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 남자에 대한 신비감이 없었다. 교회 학생부를 오가며 그네들의 사춘기를 다 보며 컸기 때문이다. 말도 놓고 남자들에게 함부로 하던 게 버릇이 돼 딱히 ‘연애 해야겠다’ 마음 같은 게 없었다. 한번은 길거리 캐스팅 제안을 받은 적도 있고, 미국 기자가 내 모습을 찍어 보내준 적도 있다. 내 성격은 모 아니면 도다. 하면 잘해야 하고 아니다 싶은 건 아예 안 한다. 그땐 뭐든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연예인 생활을 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가 반대했다. 허영심만 든다는 이유였다.

-무용을 배우는 과정은 순탄했나.

대학교 2학년 때 학교 분위기가 내가 원하던 무용 교육 환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용을 하고 싶어 서울에 왔는데 와보니 실력은 물론 인맥과 재력도 함께여야 했다. 무용만을 하기 위한 학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싸잡아서 ‘무용과 학생들은 맨날 놀러 다닌다’는 세상의 왜곡된 시선들도 싫었다. 물론 무용만 해선 밥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동네 무용 학원 운영 하면서 하루하루 살고 싶진 않았다.

-많이 힘들었겠다.

어느 날 수업을 빼먹고 고향 와서 어머니한테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말  없이 다음날 첫차로 나를 다시 올려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5시간30분 동안 울다 자다 하며 서울로 다시 왔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면서 ‘이제부터 진짜 열심히 산다. 남들 신경 안 쓰고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대학 시절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쯤은 있지 않나.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 개ㆍ폐막식 때 숙대 무용과가 나갔었다. 부채춤 등 6개월가량을 준비했는데, 잠실운동장을 엄청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선요가원 수업 모습. 박 원장은 “선요가원의 프로그램은 모두 내가 공부해 직접 짠 것들로,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인도에서 요가는 ‘대체 의학’

-이제 무용에서 어떻게 요가로 옮겨왔는지에 관해 말해보고 싶다.

대학교 3학년 때 비탈진 기숙사에서 뛰어내려오다가 택시를 마주쳤는데 나와 택시가 같은 곳으로 피했다. 몸이 붕 떴는데 순간 ‘얼굴은 다치면 안 되겠다’ 싶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땅에 떨어지면서 팔에 심한 찰과상을 입었다. 일어났는데 운전기사 아저씨 말이 더 가관이었다. “이 애가 술을 마셨나.” 어이가 없고 경황도 없는 상황에서 친구들이 택시 넘버와 기사 이름을 적고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줬다. 당시에는 119도 없었고, 겉으로도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검사 결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날 저녁 기숙사로 돌아오니까 속이 계속 메스꺼웠다. MRI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물만 마셔도 토하는 거다. 의사 얘기가 뇌라는 것이 본래 후유증이 오래 간다고 했다. 그래서 두개골이 중요한 거고. 그러던 중 갑자기 오른쪽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무조건 걸으라고 했다. 그때부터 새벽 5시40분에 효창구장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었다. 그랬더니 무릎이 시큰하고 정강이가 아팠다. 감각이 살아난 거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요가를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요가를 시작하게 된 건가.

당시엔 요가 협회가 1개인가 밖에 없었다. 협회 회장님이 곧 원장님이었다. 거기서 요가를 하면서 ‘머지않아 한국에서 요가 붐이 일거다’는 얘길 들었다. 실제로 리차드 기어, 린제이 와그너 같은 스타 배우들이 자신만의 아슈람(수행자 거처)에서 명상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요가 문화를 알릴 때였다. 원장님 말은 한국 배우들도 곧 할 거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도 따라 할 거라고 했다. 에어로빅 붐처럼 요가도 곧 부흥할 거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무용학 석사 과정 등록금을 집에서 받아 요가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다리가 많이 좋아졌다. 

-주위에서 반대는 없었나.

어머니와 스승님이 반대했다. 당시만 해도 요가는 밥벌이가 안 됐다. 그런데 나는 벌이와 상관없이 요가를 하고 싶었다. 몸을 바르게 움직일 수 있고 건강해질 수 있어 좋았다. 무용 할 땐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는데 요가를 하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성격도 부드러워지고 여유도 생기고 남들에게 관대해졌다. 요가 덕분이다. 

-언제 다시 진주로 왔나.

몸도 안 좋았고 어머니도 내려오라고 해서 29살에 다시 진주로 왔다. 와서 진주교방무, 검무 같은 전통무를 했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30살 되고 ‘웰빙’이라는 말과 함께 드디어 요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업이 조금 어려워지던 시기, 이젠 부모님을 자식이 거둬야 한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요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신안동에 있는 선배 언니 무용센터에서 중년 여성들 상대로 1년 정도 하는 등 요가인으로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선요가원은 2000년 1월2일에 오픈했다.

-무용에서 요가로 전공을 바꿨으니 많은 노력이 필요했겠다.

3년 반 동안 인도를 갔다 왔다. 눌러 산 건 아니고 중간 중간 갔다 왔다. 인도에선 요가를 대처 의학으로 여긴다. 관절 재생 안 되는 사람들, 말기 암환자들, 기적을 요하는 환자들이 요가에 의존한다. 요가를 제대로 하려면 뼈 구조는 물론 머리에서 발끝까지 신체 흐름을 모조리 알아야 해서 해부학과 생리학, 체육학과 심리학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센터는 잘 됐나.

처음엔 어머니 친구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요가는 센터 문 열고 1년이 지나면서 웰빙과 함께 완전히 떴는데, 당시 회원 수가 많아 화장실에서까지 했을 정도였다(웃음).

경상대 수시 신입생들 오리엔테이션 때 요가 하는 모습. 박 원장은 강의 다니며 학생들과 소통하는 일이 겸임교수로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경상대 수시 신입생들 오리엔테이션 때 요가 하는 모습. 박 원장은 강의 다니며 학생들과 소통하는 일이 겸임교수로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특강 더많이 하고 싶어, 요가는 힘닿는데까지 할 예정

-공부를 더 했다고 들었다.

2003년 말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용으로 석사까지 못 간 게 어머니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가까운 경상대 쪽을 알아봤는데 체육학과만 있고 운동처방 쪽은 없어서 사회체육학과 운동처방(생리) 쪽 시스템이 잘 돼 있는 부산외대로 갔다. 여기서 운동처방 논문으로 석사 2년 과정을 마치고 학교 수업을 해보라는 제안에 대학 강의까지 하게 됐다. 반응이 좋아 센터 운영을 병행하면서 부산을 왔다 갔다 했다.

-결국 박사까지 됐다.

돈 벌기 바빠서 박사까지는 안 하고 싶었다. 그런데 교수님이 경성대에 원서를 냈다. 그곳에 한국 처방계의 1인자가 있다고 했다. 그 밑에 가서 공부하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대구대를 가고 싶었다. 운동처방 쪽으론 대구대가 최고다. 한의학도 공부 하고 싶었고. 그래서 대구대에 원서를 냈다. 그런데 한 교수님이 박사 공부는 가까운 데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석사는 교수와 소통 없이 할 수 있지만 박사 과정은 지도교수 1명과 반드시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경상대인가 싶어 경상대에도 원서를 넣었다. 세 군데 다 합격을 했는데, 한 번은 대구 갔다 와 몸살이 나 다니기에 무리일 것 같았다. 교통 문제는 부산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대구대와 경성대는 포기했다. 물론 특강 관련 해 대구대는 지금도 한 번씩은 가는 곳이다.

-경상대 박사 과정은 얼마나 걸렸나.

경상대 박사 학위는 빨라야 3년이다. 본업을 병행하면 4-5년 걸리는 게 보통이고. 나는 3년 안에 공부를 끝내고 싶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은 선배들이 먼저 논문을 써야 해 힘들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 학생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다 돌렸다. 올해 논문 쓰실 거냐고. 논문 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쓸게요 교수님’하고 쓴 것이다.   

-논문 내용은 어떤 거였나.

지도교수님은 비만 중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헬스 쪽 논문을 권하셨는데 나는 요가에 관한 박사 논문을 써보겠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인복이 많다. 나를 좋게 봐주신 철학과 교수님이 요가 책 수입해서 번역해주시고, 또 다른 교수님께서 데이터 정리를 도와주신 덕에 3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경상대 교양 수업을 맡았다. 부산외대에서도 요가 수업을 해줬으면 해서 출강했고, 과기대 교양 수업은 하루 11시간까지 소화해봤다. 진주교대 겸임교수로서 예술대학원 수업도 하고 있는데 100년 학교 역사에서 내가 겸임교수 1호라고 하더라. 사립대와 달리 국립대에선 겸임교수가 드물다고 했다.

-하루가 모자라겠다.

요가로 장사를 해보겠다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체인점 내주고 인재 양성해서 강사 키울 욕심도 없다. 나는 내가 노력한 만큼만 받는다. 내가 거두지 못할 일은 안 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대학강의가 더 좋다.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이 좋고 끊임없이 공부해 스스로 발전을 이루는 것도 좋다. 바람이 있다면 특강을 많이 하고 싶다. 물론 저를 좋아하는 분들이 계속 있다면 동아리를 만들어서라도 요가는 힘닿는 데까지 계속 할 예정이다.

-본인의 ‘요가론’을 듣고 싶다.

요가는 재밌진 않지만 중독성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화를 시켜주고 몸을 바르게 만들어주는 것이 요가다. 하지만 요가를 무리하게 할 필요는 없다. TV 속 유명인들이 하는 아름다운 요가 동작을 굳이 따라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건 어마어마한 숙련이 바탕 돼야 가능한 동작이기 때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유행 따라 하는 요가는 바람직하지 않다. 또 요가를 통해 너무 빠른 효과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한 달 정도 해보고 몸이 좋아졌느니 그대로니 하는 것은 궤변이다. 무엇보다 요가는 다이어트 같은 것을 위한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요가는 몸과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엄연한 철학이다.

-마지막으로 ‘선요가원’ 소개를 부탁한다. 

나는 남의 프로그램을 쓰지 않는다. 100% 내가 직접 만든다. 아사나(요가의 체위) 하나를 해도 비디오나 책에 있는 걸 모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통 동작 하나를 하면 쉬게 마련인데 우리 요가원에선 쉬지 않고 푼다. 아프기보단 시원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게 선요가원의 기본 생각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요가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선요가원이다. 무엇보다 이곳을 거치면 요가를 보는 눈이 생긴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판단력을 갖게 된다. 모두가 요가 선생이 되는 것이다.

김성대 기자 사진제공=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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