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식의 아버지’ 김수경 박사. 그는 원기와 생명력이 스며있다고 강조하며 생식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사진=김성대기자
‘생식의 아버지’ 김수경 박사. 그는 원기와 생명력이 스며있다고 강조하며 생식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사진=김성대기자


올해로 76세인 김수경 박사는 ‘생식의 아버지’다. 충북 제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광복과 한국전쟁이라는 아픈 현대사를 모두 겪은 세대다. 읽을 책도, 서점도, 도서관도, 신문도 딱히 없던 시절, 그가 할 수 있는 건 학교 공부와 노는 일 뿐이었다.
김 박사는 서울대 법대를 목표로 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심훈의 ‘상록수’를 좋아하던 형 친구 영향으로 고려대농학과에 진학했다. 고대 전체에서 4명을 뽑는 교환학생에 뽑힌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1년 여 머물며 인생을 새롭게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쿄 올림픽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던 일본, 그곳에 사는 일본인들의 집단 사고방식을 보며 김 박사는 정신 성숙의 전환점을 맞았다.  
79년 김수경 박사는 친구와 함께 건축 자재 쪽 사업을 하고 있었다. 김 박사는 김재규와 호형호제 하던 친구를 통해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숙소였던 궁정동 안가 일을 수주했다. 총공사비는 4억7천만원이었고 2억원을 선금으로 받았다. 하지만 서면이 아닌 구두 계약이었던 탓에 그해 10월26일에 주기로 돼 있었던 2억7천만원은 끝내 받지 못했다. 10.26 사건이 일어난 탓이다. 돈을 받지 못한 김 박사와 친구는 큰 빚을 졌고 함께 제주도에 정착했다.
김 박사는 아내와 함께 제주도에서 서해약국을 운영했다. 그러다 우연히 진주 농고 출신 간 경화로 요양 차 제주도 와서 케일 농사를 지으며 케일 녹즙을 갈아마시던 진주 농고 출신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가 오간 끝에 케일 동결건조 이야기가 나왔고, 흥미가 생긴 김 박사는 케일 200kg을 사돈네가 운영하던 서울 가양동 소재 동결건조 공장으로 보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고 그 길로 케일 3톤을 본격 동결건조 하면서 서해식품 즉, 지금의 다움이 탄생했다.
김수경 박사는 생식에 기운과 생명력이 있다고 강조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생명력을 가진 생식을 먹는 것이 이치라는 게 전문가로서 그의 지론이다. 기운은 원천 에너지로서, 태양과 지구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일체 식품이라고 김 박사는 말한다. 좋은 건축 자재가 좋은 건축물을 이루듯 기운과 생명으로 충만한 생식은 곧 건강이 나쁜 사람들 몸의 리모델링을 위한 수단이 된다. 그는 이러한 생식을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체험하며 보급, 검증해나가는 일에 노후를 바치고 싶다고 밝혔다.  

생식업체 ‘다움’의 홍보 이미지. 김수경 박사는 생식을 뺀 음식 중 으뜸은 정월대보름 음식이라고 말했다. 치아와 구조가 같다는 이유에서다. 
생식업체 ‘다움’의 홍보 이미지. 김수경 박사는 생식을 뺀 음식 중 으뜸은 정월대보름 음식이라고 말했다. 치아와 구조가 같다는 이유에서다. 

◇ 충북 제천 출신, 유․청년시절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서 보내

-고향이 경상도가 아닌 걸로 안다.
△충북 제천이다. 초, 중, 고를 모두 거기에서 나왔다. 인생이란 것이 어차피 여행 아닌가. 제천을 떠나 서울, 인천, 제주도, 영월, 경주 등 다양한 곳들에서 살아봤다. 지금은 이렇게 경남 사천에 정착해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42년생이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광복과 한국전쟁을 다 봤다. 60년엔 4.19 혁명이, 61년엔 5.16 군사쿠데타가 있었고.

-전쟁 당시 기억이 나는가.
△9살 때니까 당연히 난다. 그때 인민군이 우리 마을까지 들어왔었는데 7, 8, 9월 3개월을 북한식 공산주의 아래서 생활 했다. 아이들에게 그네들 사상을 어떻게 세뇌시키는지 나 역시 경험했다. 매일 저녁 동네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연극 보여주고, 찬양 노래 가르치고. 그들이 우리가 농사지은 걸 어떤 식으로 빼앗아 가는지도 봤다. 군인들이야 나가서 직접 싸운다지만 전쟁은 질병과 폭행 등으로 민간인들에게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힌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전쟁을 이해할 수 없다. 이론으로 되는 게 아니고, 소설을 읽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현대사의 중심에 계셨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10여 년 전 세대에 비하면 우린 행운아들이었다. 75년을 기점으로 보릿고개가 없어졌는데 그 전엔 누구나, 전 국민의 2-3퍼센트를 빼곤 모두가 배고팠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런 시절을 우린 많이 안 겪었다. 그리고 어려서 전쟁에 직접 끌려가지도 않았고. 전쟁을 보긴 했지만 겪진 않은 세대인 거다. 

-덜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10여 년 정도 갭이 있는 전 세대와 비교해 그랬다는 얘기다. 그리고 경제개발계획 수립 이후 ‘공돌이 공순이’, 식모, 급사 등 일을 하며 젊은이들이 명맥을 이어가던 시절이었다. 75년 당시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53년에 휴전협정이 됐다. 중학교 갈 나이가 되신 거다.
△초등학교 졸업 때 한 반이었는데 60명 가까이 됐다. 그 중 중학교 간 사람이 1/3 정도였다. 농촌이니까. 학교도 멀고. 나는 당시 제천읍까지 13km를 걸어 다녔다. 아마 사천에서 진주 거리 정도 될 거다. 그나마 통학 하면서 읍에 살던 친척집 애들 가르치는 조건으로 밥 얻어먹으며 그러고 다녔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한 거다(웃음). 그런데 그 시절엔 나만 고생한 게 아니라 다 어려웠으니까. 요즘 친구들이 그 시절을 산다면 아마 학교 다닐 사람 거의 없을 거다(웃음).

-학창 시절은 어땠나.
△그땐 읽을 책이 없었다. 도서관도 없고 서점도 없고. 교과서 밖에 없었다. 나머지 시간엔 개울에서 물고기 잡고 겨울엔 꿩 잡고 토끼 잡고 놀았다(웃음). 아마도 그때 호연지기가 생겼던 것 같다.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산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지금 내 나이가 77살인데 얼마 전에도 천왕봉을 갔다 왔으니.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환경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그런 게 없었다. 워낙 시골이었으니까. 신문도 라디오도 TV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왔다. 시계도 하나 없어 그저 창문에 비치는 햇빛으로 시간을 알았다.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지면 저녁이고. 신문도 없어 그땐 소문이 곧 뉴스였다. ‘그렇다더라’ 하는 식이었지(웃음). 방물장사, 새우젓장사, 독장사, 친구, 선생님들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전부였던 때다.

-형제는 어떻게 됐나?
△6남매였는데 내가 다섯 번째다. 아버지는 내가 6살 때 돌아가셨고. 5살 아래 여동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태어났다. 형제들 중 지금은 큰형님과 나, 여동생 빼곤 다 돌아가셨다. 큰형님과 여동생은 지금도 제천에 살고 있다. 그 6남매를 어머니 혼자 키우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내 위로 지금은 고인이신 형님이 계셨는데 우리 동네에서 대학생 1호였다. 서울에 연고가 있었으면 서울 쪽으로 진학을 했을 텐데 연고 찾아 가다보니 사촌형님 연고가 있는 청주대학교엘 입학했다. 어린 마음에 나도 나중에 형님 따라 청주대학 가야지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고려대농학과로 진학을 했다.
△대학 간 형님이 법학을 전공해 나도 법대 가려고 했는데 결국 서울 법대엔 못 갔다. 당시 내가 영향을 많이 받은 형님 친구가 있었는데 그 분이 “농업이 가장 중요한 거다”라는 말을 해줬다. 그 양반이 고대 출신이고 심훈의 ‘상록수’ 같은 책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때 난 어렸고, 주관이 있었던 게 아닌 터라 그 말을 듣고 고려대농학과로 진학하게 됐다.

사천시 송포공단길에 있는 다움 동결건조 공장 전경. 이 공장은 지난 2000년부터 가동됐다.
사천시 송포공단길에 있는 다움 동결건조 공장 전경. 이 공장은 지난 2000년부터 가동됐다.

◇1979년 10월26일, 인생의 전환점

-대학. 인생 설계를 시작 할 때다.
△대학 들어가서 바로 군대를 갔다. 그리고 사병 만기 제대 후 복학 했다. 사실 사람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이다. 사실 나는 마음만 먹었으면 일찍 학문적인 성공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교수님들이 풀스칼러십(전액 장학금)을 만들어 줄 테니까 외국 가 공부하고 와서 교수가 돼라,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때 입주 가정교사로 살았다. 내가 벌지 않으면 학교를 못 다녔다.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도 외환소지 한도 100불인데 50불 밖에 못 가져갔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힘든 게 너무 지겨웠다. 공부고 뭐고 싫었다. 지금 보면 당시 미국에 머물렀던 내 세대들 중 잘 된 사람들이 많더라.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장학금만 갖고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밥을 먹는다는 것,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일본 교환학생 생활이 박사님 인생에 어떤 의미를 띠었나.
△고대 전체에서 4명 뽑는 교환학생에 뽑혀 일본 와세다 대학에 머물렀다. 그때 인생이라는 걸 새롭게 정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1년 정도였는데 스스로에게 정신적 터닝포인트가 됐던 시기다. 한일국교가 정상화 된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일단 한국 사람을 그리워한 교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조총련 계통에서 한국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덤비던 시절이기도 해 몸조심도 많이 해야 했고. 당시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일본인들의 집단 사고방식을 보며 정신 성숙의 전환점을 맞았다.

-사업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
△79년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궁정동 안가에서 건축사 친구와 함께 일을 했다. 그 친구가 김재규와 호형호제 하던 사이다. 당시 나는 건축자재 쪽 일을 좀 했는데 그 궁정동 안가 짓는데 참여를 했다. 총공사비가 그때 돈으로 4억7천만원이었다. 2억원을 선금으로 받고 2억7천만원을 10월26일에 주기로 돼 있었다. 공사는 10월20일 완공 됐고 당시 궁정동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 대령에게 키를 넘겼다. 그런데 6일 뒤 돈을 주기로 한 날 아침 박 대령이 내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아산만 방조제 준공식 때 대통령을 수행해야 해서 돈은 내일 주겠다 한 거다. 그 ‘내일’이라는 단어. 사실 10월26일 그날 사건 현장이 준공식 뒤 집들이 장소였다. 궁정동은 중앙정보부장 숙소였는데 청와대에서 걸어 500미터 거리에 있었다. 사실상 ‘안가’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 돈을 지금까지도 못 받았다. 당시엔 계약서도 없고, 말이 곧 법이던 시절이라. 그 돈이 안 들어와서 사업이 악순환을 겪었다. 고리를 써서라도 부도를 막으려다보니 좋지 않은 일들이 꼬리를 물었다. 당시 서울 약수동에 있던 건평 93평짜리 집도 날아갔다.

-정말 힘든 일을 겪었다.
△그래서 80년도부터 86년까지 그 친구와 같이 제주도에서 살았다. 빚을 많이 졌었는데, 제주도에서 아내와 잠 안 자며 약국을 운영해 그 빚을 다 갚았다. 그러고 86년 8월15일, 다시 서울로 왔다.

-서울로 와선 무엇을 했나.
△서울에 와서도 2년간 약국을 했다. 그런데 약국을 운영하면서 보니까 약국이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거다. 만약 그때 약국에 희망이 있었다면 아내 도와 계속 약국을 했을 거다. 점포란 권리금이 얼마가 붙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지는 건데, 과거엔 약국이 그 점포 권리금에서 항상 영순위였다. 근데 이게 자꾸 뒤로 밀리는 거다(웃음).  

김수경 박사가 대표로 있는 다움(daoom)은 88년 서해식품으로 출발해 ‘신이 만든 음식’이란 뜻의 ‘GMF(God Made Food)'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김 박사는 현재 사천 공장 내에 한옥 거처를 마련해 지내고 있다.
김수경 박사가 대표로 있는 다움(daoom)은 88년 서해식품으로 출발해 ‘신이 만든 음식’이란 뜻의 ‘GMF(God Made Food)'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김 박사는 현재 사천 공장 내에 한옥 거처를 마련해 지내고 있다.

◇ 제주도 서해호텔에서 따온 이름 ‘서해식품’

-그러다 생식을 접한 건가. 계기가 있었나.
△제주도에서 약국을 할 때 어떤 사람을 만났다. 진주 농고 출신인데 나보다 10살 정도 더 많은 사람이었다. 간 경화를 앓아 요양 차 제주도 와서 케일 농사를 지으며 케일 녹즙을 갈아마셨다. 이 사람이 이제 우리 약국에 한 달에 한 번 와서 영양제 주사를 사 갔다. 나는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해서 그 사람과 이 얘기 저 얘길 했는데, 케일 정보를 들었다. 당시만 해도 케일이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지금처럼 녹즙기도 없었고, 절구에 찧어 삼베보자기로 짜 먹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 사람 얘기가, 케일을 동결건조 시켜 분말을 내는 방법이 외국에 있다는데 어떻게 만드는지를 모르겠다는 거다. 나도 그땐 아무것도 모를 때다.
우리 약국 이름이 서해약국이었는데 당시 제주도에 서해호텔이란 곳이 있었다. 그래서 호텔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이름을 쓰게 됐는데. 

-그래서 ‘서해식품’이 된 것인가.
△맞다. 그래서 이제 그 사람 얘길 듣고 흥미가 생겨 케일을 담배 엮듯 엮어 널어 봤다. 널었더니 바싹 얼었다. 그런데 기온이 올라가면 다시 후줄근해졌다. 몇 번 시도를 하다가 다시 서울로 왔는데 그때 서울 가양동에 산업용 동결건조설비를 국내 최초로 갖춘 곳이 있었다. 풍양산업이라고. 그런데 막내 처제가 그 집 며느리다(웃음). 그래서 거기에 케일 200kg을 보내주고 한 번 말려봐 달라고 했는데 기가 막힌 제품이 나왔다. 이거다. 그 길로 제주도 간경화 앓던 그 사람 통해서 테일 3톤을 김포공항 통해 가양동 공장으로 보낸 것이 바로 서해식품, 다움의 시작이다.

-동결건조 케일이 생식의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그해 일본 식품박람회엘 가게 됐는데 어떤 일본인이 담배 상자에 담은 곡식과 물, 과일만 먹고 다니는 거다. 여행 다니면서 호텔에서 준 음식은 하나도 안 먹고. 생식을 하는 사람을 만난 거지. 그 시절 그 양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와 같았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일어나고, 부부 생활도 정상적으로 한다 그러고. 당시 내가 47살 때 77살 된 사람이 그런 얘길 하니 경이로웠다. 그래서 든 생각이 ‘아, 생식도 케일 만드는 식으로 하면 되겠구나’ 해서 정월대보름 곡식을 기본 레시피로 동결건조 했더니 생식이 나왔다. 이게 세계 최초 생식 개발이 된 거다.

-그렇게 ‘생식의 아버지’가 탄생된 거였나.
△처음엔 아내가 엄청 반대 했었다. 그 맛도 없는 거(웃음), 이러면서. 약사는 약에 대한 나름 생각이 또 있으니까. 여튼 그렇게 시작한 일이 오늘날까지 온 거다. 99년부턴 황성주 생식을 만들어주기도 했고. 사실 2000년까진 내 공장이 없어 사돈네 공장을 통해 제품을 만들어왔는데, 풍양산업 사장님이 가양동 땅을 아파트 부지로 팔고 사천과 인천에 지은 공장 중 여기 사천 공장을 내가 인수하게 된 거다. 그렇게 사천으로 내려온 거다.

-당시 생식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
△반응은 어려웠다. 하지만 21세기는 먹거리가 잘못 돼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시대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른 먹거리를 제공한다, 는 컨셉이 확실했기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사실 생식사업은 지금도 힘들다. 그러나 이건 반드시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그런 소명의식으로 해왔다.

-중간에 브랜드가 ‘GMF'로 바뀐다.
△‘Man Made Food'의 반대 개념인 ’God Made Food'라는 뜻으로 사천 공장만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종교적인 냄새가 너무 나서 지금의 다움(daoom)으로 바꿨다. 그런데 중국 가면 또 ‘다움이 뭐냐?’ 하니까(웃음). 참, 상호라는 게 쉬운 게 아니더라.

-공부를 계속 했다.
△사업을 하는 과정 속에서 ‘아, 이제 좀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91년도에 대학원엘 들어갔다. 사실 내가 좀 괴짜다. 91년이면 우리 애들도 대학생이었는데(웃음). 그렇게 대학원 들어가서 식품가공학 공부를 했다. 98년도에 석사 졸업을 하고, 2001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내 나이 60살이었다.

-대단하다.
△그런데 이제 모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보니, 세간에서 엉터리로 공부하지 않았냐는 말이 나올까봐 학위 받던 해에 식품기술사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식품기술사는 외국에선 마스터(master) 과정이다. 그렇게 2년 뒤인 2003년 식품기술사 협회 2대 회장을 지냈다. 

-‘식품기술사’란 뭔가.
△국가가 인정하는 기사 개념 즉, 마이스터 제도 같은 거다. 기능장, 명인, 명장과는 또 다른 개념으로, 그 분야 기술로 으뜸가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식품 관련 공부 한 사람이 갑근세 내는 기준으로 7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만 시험 볼 자격을 갖는다. 

김수경 박사 내외. 지난 세월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약국을 운영한 두 사람은 현재 사천에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김수경 박사 내외. 지난 세월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약국을 운영한 두 사람은 현재 사천에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사람들에게 생식 체험 전하며 노후 보내고파

-생식이 왜 좋은가.
△서양 학문과 동양 학문은 다르다. 서양 학문은 에너지, 칼로리를 논하지만 동양 학문은 기운, 원기를 얘기한다. 동양 학문이 형이상학적이지만, 사실 동양 학문이 검증과 현실을 중시하는 서양 학문보다 위에 있다. 예컨대 에너지와 칼로리로 따지면 생쌀 한 톨과 익은 쌀 한 톨이 같을 수 있다. 다른 건 온도, 수분 조건이 맞으면 생쌀에선 싹이 난다는 거다. 익은 밥은 그렇지 못하고. 싹이 나는 그게 바로 생명이다. 36.5도라는 체온, 70%의 물로 이뤄진 사람 몸은 바로 그 생명력으로 살아간다. 생식의 개념은 간단하다.

-익힌 음식은 죽은 음식인가.
△그렇지. 생명력에는 생명을 넣어줘야 한다. 현대 영양학이, 의학이, 식품학이 ‘기운’을 측정할 수 없으니까 이걸 무시하고 칼로리와 에너지로만 따지는 거다. 생명력이라는 건 측정할 수 없다. 생식에는 생명력과 기운이 스며있다. 집돼지와 멧돼지, 야생개와 애완개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 어렵지 않은 얘기다.

-작금은 칼로리와 비만의 시대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배가 고프지 않아도 먹는다. 아프리카 사자는 배가 고프지 않으면 옆에 누가 온들 쳐다보지도 않는다. 사람 몸은 기운 있는 음식을 요구하는데 입은 맛있는 음식을 요구한다. 칼로리가 아닌 기운 있는 음식을 먹으면 적게 먹는다. 무엇보다 비만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배가 고플 때만 먹는 거다.

-결국 생식이란 기운이 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다.
△영양학에선 기운을 따지지 않는다. 기운은 원천 에너지다. 태양, 지구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일체 식품이다. 하지만 원천에너지를 열로 가공하면 재생에너지, 방전에너지가 된다. 육가공 재생에너지, 지지고 볶은 방전에너지. 사람의 몸이라는 건 살아있는 건축물, 계속 건축이 이뤄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건축물은 건축 자재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다. 생식이란 결국 건강이 나쁜 사람들의 몸 리모델링을 위한 수단이다.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고 싶으신지.
△사람들에게 말로만 ‘생식하고 사십시오’ 해선 되질 않는다. 사람들이 잘 몰라 그렇지, 사실 한국인의 절반이 환자다. 그래서 생식 체험의 장을 만들어 나와 단기간이든 장기간이든 생활을 하면서 몸 전체, 생활 전체를 리모델링 하는 노하우를 검증해나가고 싶다. 그러면 개인은 개인대로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고, 나아가 그것이 사회적인 캠페인으로까지 이어지면 더 좋을 일이다. 못 하고 말지도 모르지만 하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 삶에 전환점이 돼준 분들에게 감사 편지를 써서 책을 하나 낼까 생각 중이다. 나는 만남을 어떻게 조화롭게 승화시키느냐를 두고 늘 고민해왔다. 가령 초등학교 5, 6학년 때 배운 한자를 나는 평생을 쓰고 있다. 당시 선생님이 종례 시간마다 흑판에 10자씩 써주신 덕이다. 서양에서 학문을 하기 위해선 라틴어가 필수이듯, 한국에서 학문을 하려면 한자를 모르면 안 되잖나. 내 일생 한문 때문에 답답해본 적 없게 해주신 분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 분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우리 어머니한테도 써야 하고(웃음).

김성대 기자 사진제공=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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