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공진 장군은 1010년 거란의 2차 침략 때 거란 장수를 만나 담판을 벌여 자신이 볼모로 되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였다. 대신 거란에 압송되어 가서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성종(聖宗)의 온갖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감히 우리 고려에 두 마음을 둘 수 없소"라며 끝까지 저항하다가 살해되었다. 거란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심장과 간을 씹어 먹었다 한다.강민첨 장군은 1019년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내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역시 공신에 봉해져 화상이 공신각에 걸리고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었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류: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국악당, 세종문화회관, 서울시립무용단, 의정부시립무용단, 등 전국 각처의 공연장과 무용단에서 지도와 정기공연, 특별공연 등을 해 오셨는데, 특히 2007년도에는 미국 뉴욕 국제문화예술대제전에서 공연으로 세계무대에 첫 선을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작품활동을 해 오시면서 특이할만한 공연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합니다. 원장: '진주 교방굿거리춤' 은 흥과 멋을 배분한 춤으로 더 이상 다듬을 필요가 없는 농익은 춤과 연희의 결정체입니다. 지금의 춤과 노래도 가수와 무용가가 최고이지
류: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되셨나요? 시인: 언제부터인지 잘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고 시절 자취방에서부터 시 작업은 시작되었나 봅니다. 사춘기 시절 집 떠나와 공부하던 때였으니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밤마다 소설책과 씨름하고 글쓰기에 매달렸습니다. 돌아보니 참 꿈 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때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혼 시절을 보낼 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글을 좀 쓸거라 지레짐작한 선배가 의령문협 시인을 소개해주었어요. 얼떨결에 보내버린 몇 편의 짧은 글이 끄나풀 되어 시인의 길로 엮어지고 묶이게 되었네요.류
진주의 상록복싱체육관(관장 정대헌)은 수차례의 국제 복싱행사와 세계타이틀 매치 등을 진주에서 유치하는 등 진주의 복싱을 이끌어 온 복싱계 대부이다.16살에 복싱을 취미생활로 시작하여 이후 정현상 스승을 만나 8년동안 가르침을 받으며 복서생활을 했다.진주 금곡에서 1952년 태생 옥봉에서 자라 복서생활을 한 순수 진주토박이다. 최근 침체 일로에 있는 복싱계를 걱정하며, 생활체육과 전문복서 양성을 고민하고 있는 상록체육관 정대헌 관장을 본지 편집국에서 만났다. 정대헌 관장은 복싱신인선수권·전국시도대항·도민체육대
우리 경남지역의 중간지점. 낙동강 본류와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의령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홍의장군의 고장이다.즉 의령은 의병의 고장이다.구국의 고장 의령에는 순수한 애국단체인 대한민국의 역사 그 차체라 할 수 있는 한국자유총연맹 경남시군연합회 고태주 전 회장이 있다.최근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진보와 부수의 극심한 대립의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 국정에 대응하여 쓴소리, 바른소리로 애국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의령의 터줏대감이자 자유민주보수총연맹 경남서부자민총 고태주 상임대표를 본지 편집국에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친근한 연분홍 저고리와 다홍치마가 먼저 반긴다. 가게 안을 빙 둘러보니 색색의 아름다운 한복들과 진주실크 비단들이 두 눈을 사로잡는다. 혼기를 앞둔 내 딸에게 입혀 공주로 만들어 주고 싶은 한복, 손주 손녀들에게 입히면 좋을 앙증맞은 색동저고리부터 한눈에도 따듯해 보이는 솜 넣은 누비저고리, 금은박 물린 화려한 당의와 기품 있어 보이는 궁중 한복도 꽤 많다. "제가 바느질에는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한복 짓기를 시작하고 결혼 후 남편과 아이들에겐 늘 한복만 입혔습니다. 일가 친인척은 물론 친구와 친구의 친구들까지
류:컴퓨터공학 전산전문인으로 첫 발걸음을 하셨다는데 전산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김:1974년에 기업체에 입사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미래의 새로운 기술과 학문, 그리고 직업 분야에 대해서 고민하던 중 당시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컴퓨터교육센터(KWCC: 광운공과대학교 컴퓨터교육센터)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과정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컴퓨터와의 그 첫 만남은 나의 직업진로분야로 내딛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으며, 오늘이 있기까지 한 평생 전산전문인으로 살아오면서 후진 양성에 헌신봉사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그 발걸음을
칠암동천에서 예를 올리며 정든 교정 떠나제자들과 마로니에(서양 칠엽수) 묘목 식재경남과학기술대학교 조경학과 강호철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정년퇴임 행사를 마쳤다고 3일 전했다.강 교수는 지난달 26일 28년 재임 기간에 걸쳐 지도해 온 학생 동아리 '한마음 칠엽수' 제자들과 모교 칠암동천에서 예를 올리며 정든 교정을 떠나게 되었다. 강 교수는 칠암동천과 비봉산 기슭에서 지난해 10월에 채취하고 노천매장으로 저장한 차나무 종자를 비봉산에 심었다.차나무를 비봉산에 식재한 의미는 강교수는 그동안 「비봉산
동광장학회는 해인사 전 주지 명진대종사(1939~1998년)의 유훈에 따라 제자인 달마사 주지 해일스님이 은사의 뜻을 받들어 지난 2009년부터 '동광장학사업'이란 이름으로 16회 동안 5억원 이상의 장학금과 성금을 매년 기부하여 지역사회에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는 장학사업단체이다.2021년 올해로 13년째 되는 '동광장학회'는 그동안 기부한 장학금과 성금만 무려 5억8천여만원에 이른다.달마사(주지 해일스님.대한불교 조계종 해인사 포교당) 내에 소재한 동광장학회는 매년 1~2회에 걸쳐 중,고,대학생과 어
인간은 오래전부터 토지 위에서 생활과 생산을 영위해왔다. 토지는 모든 생존의 기본이다. 집과 음식은 토지 위에서 창출된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도시계획에는 항상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성소(聖所)가 포함되었다. 토지신은 ‘사(社)’, 곡식신은 직(稷)‘이라고 하여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사직단을 설치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발견된다. 고려 성종 10년(991)에 사직을 세웠고 조선은 태조4년(1395) 인달방에 역시 사직을 설치했다. 한양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동)에는 종묘
류: 본래는 화학공장을 경영하신 사업가로 알고 있는데, 환경보전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황: 환경실천운동의 시작은 제가 맨 처음 사업을 시작한 것이 ‘(주)대진화학’이라는 환경오염원을 배출하는 화학공장이었습니다. 화학공장을 경영하면서 제가 환경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환경보전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류: 한국폐자원재활용수집협의회의 임원으로도 활동하셨다는데 이 단체는 어떠한 일들을 합니까?황: 폐자원 재활용이란 한마다로 고물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역사회 내에서 결손가정아동들을 대상으로 가정의 해체나 해체위기에 처해 일시적으로나 장기적으로 아동을 양육할 수 없게 되는 경우 가족의 역할을 대신하여 아동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며, 해체위기에 처한 가정을 대상으로 가족지원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가족결속력을 강화하여 가정해체를 예방 치료하고자 설립되었으며 또한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결손가정 아동의 복지증진에 지역사회주민들이 지역문제의 연대적 책임을 인식하여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 결과적으로 지역사회 욕구해결 및 복지증진에 기여하고자